책소개
강동수의 소설에는 현실 세계의 불온한 장벽에 부딪쳐서 일그러질 수밖에 없는, 그래서 좌절과 절망의 그늘 속으로 잠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인간이 선택하게 되는 최선의 방책이 무엇인지 고민한 흔적이 가득하다. 사랑과 평화, 그리고 생명이 지니는 가치의 재발견과 함께 행복한 삶의 조건을 구성하는 이들 요소의 결락이 인물들로 하여금 어떤 방식의 삶의 태도로 귀결하게끔 추동하는지 작가는 보여준다. 한때 순수한 열정으로 세계를 바꾸려고 했지만 ‘당연하게도’ 세상의 중력에 흡수되고 마는 수많은 사람의 변색된 이상은 아마 작가에게도 찾아왔을 것이다. 그러므로 소설은 꿈꾸었지만 좌절될 수밖에 없고, 다른 방향과 색채로 그 꿈을 전이시킬 수밖에 없는 인간의 지난한 고민의 속내를 살필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목차
7번 국도
알록달록 빛나는
정염
금발의 제니
수도원 부근
아를의 여인
그 여름, 유리의 성에서
몽유 시인을 위한 변명
해설 순정한 세계를 꿈꾸는 아이디얼리스트의 글쓰기 | 정훈
작가의 말
저자소개
출판사리뷰
소설 선집에 실린 작품들은 첫 소설집인 『몽유시인을 위한 변명』(문학과지성사, 1997)을 비롯해서 소설집인 『금발의 제니』(실천문학사, 2011)와 『언더 더 씨』(호밀밭, 2018)에 수록되어 있다. 단편이 주는 강렬한 이미지와 밀도 높은 주제를 박진감 있게 끌고 가는 솜씨는 모든 소설가에게 요청되는 능력이라고 할 때, 강동수의 소설에는 이러한 능력과 아울러 두터운 현실의 벽을 파헤치려 하지만 번번이 허무와 상실로 발길을 돌리게 되는 어떤 스산한 기분과 빛깔을 빚어내는 경향이 짙음을 볼 수 있다.
선집에 실린 작품은 제각각 장벽 같은 현실을 헤쳐 나가는 인물들의 고군분투가 도드라져 있다. 저마다 사연을 간직한 채 마음속 깊이 품은 꿈과 이상이 너덜너덜해지면서 조각나버리는 과정을 보면, 삶이라는 구속 상태를 벗어나기 위한 방법은 어디에 있으며 또한 우리에게 세상은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소설은 그런 인물과 그런 세계가 부딪치며 굉음을 자아내게 하는 마당이지만, 어쨌든 상실과 절망으로 가득 찬 세계를 재현하면서도 환한 세상을 만드는 일말의 가능성조차 전혀 주어지지 않는 건 아니다. 사람들은 좌절될 수밖에 없더라도 꿈을 꾸었다는 사실에 의미를 두면서 만족한다. 이건 ‘정신승리’를 말하는 게 결코 아니다. 인간에게 꿈은 유전된다. 세대와 세대를 거치면서 그것은 만들어지면서 더욱 큰 희망을 뒤 세대에게 안긴다. 그러므로 시간이야말로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창출하거나, 그 가치의 의미를 일깨우는 묘약인 셈이다. 그러나 가출 카페에서 만난 아이들이 ‘가출팸’(가출과 패밀리의 합성어)이라고 하는, 한집에서 가족처럼 살아가면서 생긴 비극적인 사건을 다룬 「알록달록 빛나는」이나, ‘성장정지증 환자’로 살면서 세상과 절연한 채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지만 화자인 동생의 예상하지 못한 위험한 계획으로 그만 목숨을 잃고 마는 한 남자의 일생을 담은 「아를의 여인」의 경우에는 저도 어찌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망가져가는 존재의 허무함이 두드러져 있다. 우연이 개입하게 되었지만 소설적 필연이 되고 만 작품이다.
강동수는 뜻하지 않게 조각나고 파괴되어버리는 인물의 삶을 보여주면서 중요한 진실 하나를 우리에게 은근슬쩍 내비친다. 가족이든 사회든 어떤 ‘관계성’에 빗금을 치거나 균열을 내면서 발생하게 되는 실존의 변형이 어떤 모양새를 내든 자신이 구축해나가는 새로운 세계에 온전히 자리잡아나가는 과정에서 잃지 말아야 할 인간의 품성이 그것이다. 교사와 제자로 만나 사랑을 한 후 결혼하지만 아내의 외도로 이혼하며 각자 삶을 살아가는 중, 군대에 있는 아들의 사고로 다시 만나면서 과거를 반추하는 형식으로 된 「7번 국도」도 줄거리보다는 인물이 새로운 삶을 결단하는 과정에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개성적인 작품이다. 개인마다 제각각 다른 양상을 보이는 성격이나 특징이지만 때에 따라서는 생뚱맞아 보이는 것조차 어떤 의미에서는 당사자의 순정한 판단과 믿음에 근거하는 경우가 흔하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이의 결정을 두고 섣부른 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 이는 소설 속 인물이 가지는 개연성과, 인물이 처한 상황의 맥락에서도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삶의 단면일 뿐이다.
근대소설이 제기했던 문제의 핵심은 ‘무엇’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하느냐이다. 죽음과 사랑 같은 소설의 흔한 주제도 마찬가지다. 자명한 개념과 가치를 두고 어떻게 접근해 들어가느냐 하는 문제가 소설 쓰기의 일차방정식이라고 할 때, 강동수 소설이 끈질기게 탐구하려 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태도와 삶의 방식인 것이다. 선택과 판단에 뒤따르는 인물의 성격이나 상황 변화를 직시하면서도 역사와 사회를 유지하는 가장 진실한 주체로서 인간에게 마지막 남은 ‘인간성’, 이것이 인간이 인간이게끔 하는 본질적인 요소라고 역설하는 듯 보인다. 이럴 때 생겨나는 꿈과 이상을 좇는 한 인간의 고독한 분투와, 실패하거나 좌절하더라도 엄정하게 지난날을 복기할 수 있는 이성을 잃지 않는 사람의 일대기를 강동수는 소설 쓰기를 통해 우리에게 귓속말로 전한다. 이것이 또한 오염되거나 훼손되지 않는 순정한 세계가 무엇이었는지 늘 생각하는 지식인으로서 강동수 작가가 추구하는 문학적 실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