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도서
    국내도서
  • 베스트셀러
    베스트셀러
  • 새로나온도서
    새로나온도서
  • 추천도서
    추천도서
  • 할인/재정가 도서
    할인/재정가 도서
  • GIFT
    GIFT
  • 애국지 : 의사 윤봉길 선생편 (마스크제공)

애국지 : 의사 윤봉길 선생편 (마스크제공)

22,500 25,000
제조사
한국학자료원
원산지
대한민국
배송정보
무료 지역별 추가배송
택배

21615d286a4b23fc9ded08f4bbbe3a95_192355.jpg
 


책소개

윤봉길의사가 1930년 3월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기 위해 고향인 충남 예산을 떠나면서 남긴 ‘이향시(離鄕詩)’ 한글 원문이 공개됐다. 이 시는 윤봉길의사 기념사업을 하는 월진회(月進會)의 윤주(尹洲) 이사가 국회도서관에서 발견한 것으로 ‘애국정신선양회’가 1951년 발행한 ‘애국지’ 시리즈 가운데 ‘의사 윤봉길 선생’편에 실려 있었다.

윤이사는 “1933년 중국 상하이에서 발간된 중국어판 ‘윤봉길전’(김광 지음)에 이 시의 중국어 번역문이 실려 있긴 하지만 한글 원문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덕산군 현내면 조량리(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78번지 목바리마을) 광현당에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예산리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고려 시대의 명장이었던 윤관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윤황(尹?)이며, 어머니는 경주 김씨 김원상(金元祥)이다. 1911년 3월 4세 때 광현당에서 저한당으로 옮겨와 23세까지 생활하였다.[2] 1918년 덕산보통학교(현 덕산초등학교)(德山普通學校)에 입학하였으나, 조선인이 조선말을 못 쓰고 일본말을 써야 하는 것과 교장이 일본인인 것에 불만이 많았고, 게다가 다음 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을 받아 일본말을 배우는 것과 일본인 교장 밑에서 교육을 받는 식의 식민지 노예 교육을 배격하면서 부모님 앞에서 학교를 자퇴할 것을 선언하였고, 그렇게 학교를 그만 두었다. 대신 최병대(崔秉大) 문하에서 동생 윤성의(尹聖儀)와 함께 한학을 공부하였으며, 1921년 유학자인 매곡 성주록(成周錄)의 서당 오치서숙(烏峙書塾)에 들어가 그의 문하생이 되었다. 오치서숙에서 윤봉길은 사서삼경 등 중국 고전을 두루 익혔다.[2] 1922년 15세에 성주 배씨 배용순(裵用順)하고 결혼하였다. 학업 성적이 우수하여 1923년 16세에 오치서숙 춘추 시회에서 장원을 하기도 했다. 1926년 윤봉길은 매헌(梅軒)이라는 아호를 얻었다.[2] 1928년 18세 되던 해에는 시집 〈오추〉(嗚推), 〈옥수〉(玉睡), 〈임추〉(壬椎) 등을 발간하였다. 1929년 오치서숙을 졸업, 한학수업을 마쳤다.

목차

1. 켜지지 않는 성냥 (7)
2` 의사의 탄생. (15)
3. 자라 나면서. (학교공부 16)
4. 진리를 찾아서 ·· (독학) (21)
6. 망국민의 설움 (1.상공업 2.관리 3.농촌. 4.수리조합. 5.어촌과 광산 동경지진) (24)
6. 후생회 설립 (32)
7. 월진회의 조직 (35)
8. 할아버지의 유언 (40)
9. 유랑의 길 (42)
10. 유랑시 (45)
11. 신의주를 거쳐 청도로 (47)
12. 종에게 (52)
13. 상해시대 (53)
14. 친목회 조직 (58)
15. 때는 왔다 (60)
16. 의거의 준비 (63)
17. 일편단심 (69)
18. 유가족을 찾아서 (78)

저자소개


출판사리뷰

농촌 계몽 활동

청년 시절에는 농민 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1929년 오치서숙을 졸업한 윤봉길은 농촌 계몽 활동, 농촌 부흥 운동, 야학 활동, 독서회 운동 등을 시작하였다. 1927년 농민독본 3권을 저술하였다. 1928년 부흥원 설립을 기념하는 공연인 우화 「토끼와 여우」의 공연과 월례강연회를 개최하였으며 〈기사년 일기〉(己巳年 日記)를 지었다. 이어 위친계(爲親契) 조직, 월진회, 수암 체육회 등을 조직하였다.[2]

1930년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글귀를 남기고 집을 떠나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후에 이 정보를 일본 경찰이 입수하여 미행, 평안도 선천에서 체포되어 45일간의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출옥 후에 중국의 만주로 망명하였다.

폭탄 투척 직후 체포, 곧바로 헌병으로 넘겨지면서 보다 가혹한 심문과 고문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8] 1932년 5월 28일 상해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1932년 11월 18일 일제 대양환 편으로 일본 오사카로 후송되어 20일 오사카 육군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32년 12월 18일 가나자와 육군구금소로 이감되었다.

1932년 12월 19일, 일본 가나자와에서 총살형을 당했다.[2] 1932년 12월 19일 새벽 7시 27분 일본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미쓰코지야마 서북골짜기에서 십자가 모양의 형틀에 묶인 사형수(윤봉길)는 미간에 총알을 맞고 13분 뒤에 순국했다. 시신은 아무렇게나 수습되어 가나자와 노다산 공동묘지 관리소로 가는 길 밑에 표식도 없이 매장되었다. 사형 집행 전에 미리 파 놓은 2미터 깊이의 구덩이에 시신을 봉분(封墳)도 없이 평평하게 묻어놓은 것으로,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도록 했다. 윤봉길 의사가 수뇌부를 섬멸시킨 데 대한 일제 군부의 처절한 복수였다

상품필수 정보

도서명
애국지 : 의사 윤봉길 선생편 (마스크제공)
저자/출판사
애국정신선양회 ,한국학자료원
크기/전자책용량
152*225*15mm
쪽수
82쪽
제품 구성
상품상세참조
출간일
2024-05-30
목차 또는 책소개
상품상세참조

비밀번호 인증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세요.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