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이 책은 한흑구의 출생부터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그가 걸어온 길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가 남긴 문학작품을 중심으로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에서 그가 대응한 삶의 자세와 철학을 담았다.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단 한 편의 친일 문장도 남기지 않은 영광된 작가”요 “시 한 줄에도 나라를 생각하였던 시인”이며, 미국 유학하는 동안 “영어시로 조선심을 표현”하고자 했던 열혈 청년 한흑구를 만날 수 있다.
목차
서문
1. 민족의 현실을 직면한 청소년 시절
시인의 출생 / 105인 사건과 아버지의 망명 / 3·1 만세운동 / 방랑이 시작되던 시절 / 민족교육을 받으며 / 민족의 현실을 암시적으로
2. 조국의 독립을 생각하다
3·1운동 기념일을 맞으며 / 시인이 된 검갈매기 / 노스 파크 대학 시인클럽과 영시 / 윌슨 문학회와 코즈모폴리턴 클럽 / 재미한인사회과학연구회를 창립하고 / 고국에 대한 사랑을 문학예술로 표현하고 / 흥사단 가입과 청년 활동 / 이승훈의 서거와 안창호의 체포 / 청년 한흑구의 혈기가 묻은 시 / 친구의 사망과 축출 앞에서 / 의미 있는 고학 생활 / 조선으로 귀국을 준비하며
3. 조선으로 돌아오다
귀국선을 타고 / 『대평양(大平壤)』 창간과 작품 활동의 시작 / 김세형과 재회, 그리고 『먼 길』 / 항일 작품을 발표하면서 / 어머니와 사별 / 『백광(白光)』 창간과 수양동우회 활동 / 검열로 삭제된 원고와 방송 / 성대장 주인의 농촌 생활 / 눈 감지 않은 동면
4. 자유민주주의적인 조국, 평화로운 세계를 꿈꾸며
조국 해방과 닭 울음 / 삼팔선을 넘어 / 아버지의 선종 / 미국에서 체험한 것을 / 이념 대립 속에서 『문화시보』의 편집을 맡고 / 서울을 떠나 포항으로 / 번역과 창작 활동 / 문화운동과 이북인회 조직, 그리고 전쟁
부록 1. 흑구 한세광의 필명과 표기에 관하여
부록 2. 인터넷 게시 사전류에 나타난 한흑구의 이력에 관하여
부록 3. 독립운동가 한승곤(韓承坤)
부록 4. 농촌계몽운동가 방정분(邦貞分)
[그림 1] 한흑구가 다니던 평양 산정현교회 주일학교의 1915년의 모습.
[그림 2] 평양의 숭인학교.
[그림 3] 한흑구(한세광)의 시 「거룩한 새벽하늘」 원문.
[그림 4] 1929년~1930년 사이 노스 파크 대학의 주니어 칼리지 시절의 한흑구.
[그림 5] 1930년 College Freshmen 동기생들의 모습.
[그림 6] 1930년 노스 파크 대학의 시인클럽에서 발간한 동인지 Pegasus 창간호와 판권지.
[그림 7] 한흑구가 최초로 발표한 영시들.
[그림 8] 한흑구가 흥사단 입단 서약을 하였던 흥사단 단소.
[그림 9] 귀국 당시의 한흑구(한세광).
[그림 10] 동우회 추계원족회 참석자 명단.
[그림 11] 평양문인좌담회 장면.
[그림 12] 동우회 평양지방회 명부.
[그림 13] 강서군 성태면 연곡리의 모습.
[그림 14] 1945년 월남 후 서울 생활 시절의 한흑구.
[그림 15]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 시절의 한흑구.
[그림 16] 한승곤 목사 장례식.
[그림 17] 광복 후 최상수 민속학자의 집에서.
[그림 18] 『신한민보』(1929년 12월 12일)에 게재된 한흑구가 필명 ‘검갈메기(검갈매기)’로 발표한 시 「무뎨록」의 첫 부분.
[그림 19] 1955년 10월에 발간한 『디 애틀랜틱(The Atlantic)』의 표지.
[그림 20] 1956년 1월에 발간한 『디 애틀랜틱(The Atlantic)』의 표지.
[그림 21] 1949년 한흑구가 번역 출간한 『현대미국시선』(선문사)의 속표지.
[그림 22] 1926년 안창호, 한승곤, 장리욱.
[표 1] 흑구 한세광의 이름과 필명에 대한 표기.
각주 겸 참고 자료
저자소개
출판사리뷰
수필가로만 알려졌던 한흑구가 시와 소설을 썼고, 수필과 평론, 번역가요 영문학 논문을 쓴 작가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그리 많지 않다. 더욱이 일제강점기에 미주흥사단과 수양동우회를 통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핍박받고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사실도 알려지지는 않았다. 후일 문학평론가 임종국이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단 한 편의 친일 문장도 남기지 않은 영광된 작가”로 규명한 것처럼 조국 광복 때까지 지조를 지키며 절개 있는 삶을 살았던 작가이다. 이 책은 바로 한흑구가 남긴 글들을 통하여 그의 지조와 절개 있는 삶을 증명할 뿐만 아니라, 그동안 우리에게 잘못 알려진 일들의 고증을 통하여 바로 잡고 있다는 사실에서 매우 가치가 있다.
한흑구는 그가 발표한 수많은 글 속에 국권을 상실한 조국에 대한 사랑과 민족의 아픔을 노래하기도 하였고, 귀국 후에도 줄곧 나라는 걱정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조국’, ‘고국’, ‘국가’ ‘나라’와 같은 단어들을 마음 놓고 말할 수 없었기에 그 타는 마음을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모두 공감하는 바가 아니었겠는가? 그런 그에게 마음껏 노래 부를 수 있는 조국의 이름이 있고, 땅이 있고, 민족이 있다는 것, 더군다나 그 모든 것 위에 새로운 조국을 건설하는 사명을 지녔다는 것은 실로 가슴 벅찬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나는 대한 사람으로 이러한 세대에 태어나, 나라 건설의 사명을 띠게 된 것을 큰 행복으로 생각하고 자랑하고 싶었다.”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다.
그의 당당함은 그가 일제강점기 동안 보여준 지조 있는 삶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 삶의 정신이 그의 시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 수많은 산문에도 나타난다. 비록 그의 전체 작품을 확보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신문과 잡지에서 발견되는 그의 작품 가운데 많은 것이 고국에 대한 사랑과 독립을 기원하며 쓴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일제의 탄압과 박해 속에서 육체적 목숨을 내놓는 ‘피의 순국’은 못하였지만, 평생 문학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일깨우기 위하여 노력하였던 작가, 임종국의 말대로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단 한 편의 친일 문장도 남기지 않은 영광된 작가인 한흑구는 자신이 고백하였던 것처럼 한 줄 시에도 나라를 생각했던 우국시인이요, 민족시인이었다. 우리는 한흑구를 ‘민족작가’라고 불러야만 하지 않을까?
한흑구는 우리나라 근대문학의 어떤 유파에도 속하지 않았고, 유파도 형성하지 않은 채 독자적인 문학세계를 구축하였던 시인이요, 민족의 자주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독립의 그날까지 ‘백색 순국’의 마음으로 투쟁하였던 시인이었다. 우리나라의 광복 이후 맑고 순수한 빛과 같은 언어를 바탕으로, 시적 수필을 통하여 민족 부흥의 정신적 징검다리 역할을 하며, 정신적 가치의 숭고함을 노래하였고 국민 계몽을 위하여 문학을 통한 지방과 지역의 문화운동을 선도한 선구자이기도 하였다. 한흑구를 민족작가 자리매김하는 일은 우리 문단사의 중요한 일이요 나아가 우리 민족의 정신사와 교육사에도 중요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