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춘향전」의 결정판, 『남원고사』를 교주하다
서울대 국문학과 정길수 교수가 펴낸 『남원고사』는 국내 연구자로서는 네 번째로 학술 주석을 붙인 교주본이다. 『남원고사』는 1860년대 서울 종로에서 필사된 책이 프랑스 파리로 옮겨 가 있다가 1970년대에 뒤늦게 알려지면서 즉시 「춘향전」의 최고봉, 「춘향전」의 결정판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춘향전」의 수많은 버전 중 『남원고사』는 생기발랄한 춘향 캐릭터와 서사 구성의 일관성을 지닌다. 그래서 「춘향전」의 초기 버전에 상대적으로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정길수 교수는 가장 생기발랄한 ‘야성’(野性)을 지닌 ‘김춘향’의 형상, 풍성한 디테일, 우리 주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이웃들, 곧 절대 선인도 절대 악인도 아닌 인간 군상을 그 모습 그대로 인정하는 서술자의 시선이 좋아 『남원고사』를 「춘향전」의 최고봉이라고 말한다.
연구자는 물론 고전에 큰 관심을 가진 독자들이 「춘향전」, 그중에서도 『남원고사』의 진가를 이해하는 데 기초 자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자세한 학술 주석(2,371개의 주석, 200여 개에 달하는 교정)을 붙여 한 권의 책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정길수 교주 『남원고사』는 프랑스 국립동양언어문화대학(INALCO) 소장 필사본(5책, 『춘향전사본선집 1』, 명지대출판부, 1977 영인; 김진영 외 편저, 『춘향전 전집 5』, 박이정, 1997)을 저본으로 삼았다. 그리고 『남원고사』 계열에 속하는 『춘향전』 동양문고본(향목동 세책본: 『춘향전 전집 5』)과 최남선의 『고본 춘향전』(신문관, 1913)을 참고하여 저본의 오류를 바로잡았다. 기존의 모든 주석서, 즉 1970년대 김동욱·김태준·설성경 교수의 『춘향전 비교연구』(삼영사, 1979)와 이윤석 교수의 『남원고사 원전 비평』(보고사, 2009), 설성경 교수의 『춘향전-남원고사』(서울대출판부, 2016)를 참조하면서 주석을 대폭 추가하고 기존 주석의 일부 오류를 바로잡았다.
목차
책머리에
권 1
1. 서장(序章)
2. 이도령
3. 봄나들이
4. 광한루
5. 춘향
6. 만남
7. 약속
8. 상사(相思)
9. 초조번민
10. 춘향 집 가는 길
11. 월매
권 2
1. 춘향의 집
2. 권주가
3. 춘향의 거문고
4. 이도령의 천자풀이
5. 이도령의 바리가
6. 데굴데굴 인간지락
7. 흥진비래
8. 첫사랑 첫 이별
9. 긴 한숨
10. 이별의 술잔
11. 귀덕이
12. 이별 후가 더 어렵다
권 3
1. 신관 변악도
2. 남원 가는 길
3. 기생 점고
4. 기생이 열녀 되랴
5. 절통 춘향
6. 춘향 압송
7. 춘향의 발괄
8. 어른의 웅심한 맛
9. 숫자 노래
10. 맹장 삼십
11. 하옥
12. 왈자
권 4
1. 왈자의 노래
2. 왈자의 책 읽기
3. 왈자의 놀이
4. 수심가
5. 월매의 슬픔
6. 장원급제
7. 어사 출동
8. 농부들
9. 산사의 선비들
10. 십시일반
11. 옥중편지
12. 사또의 악정
13. 다시 찾은 춘향 집
14. 허판수
권 5
1. 해몽
2. 상봉
3. 춘향의 소원
4. 출도 준비
5. 잔치
6. 어사 입장
7. 파흥
8. 난리법석
9. 출옥
10. 기생 점고
11. 열녀 춘향
12. 강동강동 월매
13. 대단원
해설 『남원고사』와 사랑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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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출판사리뷰
『남원고사』 학술 주석의 역사
『남원고사』를 읽는 일은 한문소설을 정밀하게 독해하는 것 이상으로 어렵다. 작품 곳곳에 삽입된 한시나 한문 전고(典故)를 파악하는 것은 연구자들이 시간과 노력을 투여하면 거의 해결 가능하지만, 오늘날 그 시대의 우리말과 속어, 속담, 당대의 풍속을 정확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이 문제다. 이 때문에 자세한 주석서가 필요한데, 최초의 교주본이라 할 최남선의 『고본 춘향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남원고사』 주석의 역사는 한국 고전소설을 통틀어 가장 긴 편에 속한다.
최남선의 『고본 춘향전』은 『남원고사』의 개작본으로, ‘허두가’(虛頭歌)라고 부르는 『남원고사』 서두의 노래를 새로 창작한 노래로 바꾸고, 중국의 지명과 인물 고사를 조선 것으로 바꾸었으며, 외설적인 장면이나 표현을 모두 제거한 것이어서 『남원고사』의 온전한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고본 춘향전』은 이처럼 『남원고사』의 온전한 모습을 간직한 것도 아니고, 오늘날의 원전 주석에 해당하는 풀이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남원고사』 주석의 선구적인 성과이다. 본격적인 『남원고사』 주석 작업은 1970년대 김동욱·김태준·설성경 교수의 『춘향전 비교연구』에서 시작되어 이윤석 교수의 『남원고사 원전 비평』과 설성경 교수의 『춘향전-남원고사』에 이르렀다.
정길수 교수는 이 책에서 『고본 춘향전』을 비롯하여 가장 상세한 주석을 담은 『남원고사 원전 비평』 등 기존의 모든 주석서를 참조하면서 지금까지 의미와 출처가 밝혀지지 않았던 미상 구절에 대한 주석을 대폭 추가하고 기존 주석의 일부 오류를 바로잡고자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어구가 적지 않고, 혹 지나친 억측으로 기존의 올바른 주석을 오히려 해친 결과에 이르지 않았는지 조심스러운 바 있다. 정길수 교수는 잘못을 계속 수정하며 한국 고전소설의 걸작 『남원고사』를 정밀하게 독해하고 「춘향전」 해석의 폭과 깊이를 더하는 데 바탕이 되는 자료로 만들어 가고자 한다.
『남원고사』, 「춘향전」의 가장 초기 버전이자 대표 버전
춘향이라고 하면 우리는 ‘성춘향’을 떠올리지만 ‘김춘향’도 있다. 이도령이 책방에 갇혀 사는 양반댁 도련님으로 설정된 버전이 있는가 하면 어린 나이에 기생집을 드나들며 기생 상대하는 법을 터득한 난봉꾼 캐릭터로 등장하는 버전도 있다. 모든 버전이 이몽룡과 춘향의 사랑을 테마로 삼아 큰 틀에서 대동소이한 스토리를 가진 「춘향전」이지만, 각각의 버전마다 뚜렷이 구별되는 특징이 도처에서 발견된다.
『남원고사』(南原古詞: 남원의 옛 노래)는 「춘향전」의 초기 버전에 가까운 것으로 추정되는, 「춘향전」의 대표 버전이다. 1860년대 서울 종로의 누동(樓洞: 다락골)에서 필사되어 서울의 세책가(貰冊家: 도서대여점)에 있던 책이 지금은 프랑스 국립동양언어문화대학(INALCO)에 있다. 1970년대에 『춘향전사본선집 1』(명지대출판부, 1977)로 영인 출판되었고, 작품이 소개되자마자 「춘향전」의 최고봉, 「춘향전」의 결정판으로 지목되어 왔다.
『남원고사』는 1823년부터 1864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총 5책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제1·2·3책은 1864년, 제4·5책은 1869년에 필사되었다. 1860년대에 유통된 책이지만 현재 전하는 「춘향전」 여러 버전 중에서는 가장 이른 시기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되어 「춘향전」 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또 하나의 중요한 버전인 ‘완판 84장본’ 『열녀춘향수절가』가 1906년 무렵에, 신소설 작가 이해조의 『옥중화』(獄中花)가 1912년에 출판된 점, 널리 유통된 이 두 버전과 『남원고사』 사이에 뚜렷한 차이가 있는 점까지 고려하면 「춘향전」의 초기 버전에 상대적으로 가까운 『남원고사』를 통해 「춘향전」의 원형(原型)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남원고사』 계통의 이본인 일본 동양문고 소장본, 육당 최남선이 1913년 신문관에서 간행한 『고본 춘향전』이 모두 『남원고사』를 변개한 버전이고, 전주의 ‘완판본’과 함께 시장을 양분했던 ‘경판 30장본’ 등 서울의 ‘경판본’은 『남원고사』의 축약 버전에 해당한다.
『남원고사』의 글자 수는 대략 한글 8만 5천 자로,「춘향전」 중에서는 가장 긴 작품에 해당해서 ‘완판 84장본’의 두 배 분량에 이른다. 「춘향전」의 원형, 또는 『남원고사』보다 이른 시기에 성립된 초기 버전에 비해 대규모 확장이 이루어진 결과다. 『남원고사』에서 대폭 확장된 부분은 대개 서사 진행과 크게 관계 없는 소소한 장면의 확대에 해당한다. 때로는 그 시대에 유행하던 시가를 대량 삽입하고, 때로는 리얼리티에 손상을 줄 정도의 장황한 나열식 대화가 이어진다.
『남원고사』는 ‘사랑의 약속’에 관한 소설이다
『남원고사』는 춘향과 이도령의 사랑 이야기이다. 그런데 두 사람이 어떻게 ‘사랑의 약속’을 지켰는가, 특히 춘향의 입장에서 사랑 앞에 놓인 달콤한 유혹과 모진 시련을 어떻게 대처해 나갔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보면 단순한 사랑 이야기를 넘어서 있다. 대단원의 도정에서 만난 인간 군상과 세태는 때로는 따뜻하고 때로는 오싹하다. 그러나 동정을 보내기도 하고 차갑거나 음험한 시선을 던지기도 했던 주변 사람들은 평소 매몰차고 교만하다 여겨 왔던 춘향의 집념, 사랑을 향한 일념에 차츰 공감하며 한편이 되어 갔다. 그리하여 『남원고사』는 성스럽기도 속되기도 한, 순수하기도 교활하기도 한 인간 존재의 양면에 대한 냉정하고 따뜻한 시선, 실리에 따라 표변하는 세태까지 그대로 인정하고 포용하는 시선 아래 ‘그럼에도’ 인간의 어떤 마음과 태도가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가 묻고 답하는 소설이 되었다.
『남원고사』의 김춘향은 한국 고전소설사에 처음 등장한 독특한 인간형
『남원고사』의 김춘향은 어떤 인물형일까? 작품 곳곳에는 김춘향에 관한 등장인물의 평가가 이어진다. 이에 따르면, 춘향의 성품은 매몰차고 교만하다. 춘향은 본래 도도한 성품에다 부사 아들의 세력까지 끼고는 안하무인으로 관속들을 무시하는, 매우 고약한 ‘아이년’이다. 춘향에 대한 주변 인물의 평가는 완판 84장본을 비롯한 후대 버전에서 정반대로 바뀐다.
김춘향은 위기에 처하면 평소에 거들떠보지도 않던 이에게 아양을 부리고 거짓말도 서슴지 않으며 자신에게 적대적인 이들의 마음을 금세 돌리는 법을 아는 능수능란한 여성이다. 얄밉다면 얄미운 캐릭터이나 영악하면서도 깜찍한 정도지 밉살스러운 모습은 아니다. 허판수의 해몽 에피소드까지 보고 나면 『남원고사』의 김춘향은 한국 고전소설사에 처음 등장한 독특한 인간형이라는 점이 좀 더 뚜렷이 드러난다.
앞선 시대 소설의 청순가련형 여주인공과도 다르고, 대쪽같은 지조의 직선적인 여주인공과도 다르며, 교묘한 수단을 부리는 대담무쌍한 악녀와도 다른, 사랑스러우면서도 능수능란한 임기응변으로 상대를 제압해서 자기 뜻을 관철시킬 줄 아는,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가 탄생했다.
『남원고사』의 인간관: 밤 잔 원수 없다
『남원고사』의 인간관은 ‘밤 잔 원수 없다’는 최패두의 말, 곧 ‘밤 잔 원수 없고 날 샌 은혜 없다’라는 속담에 집약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순식간에 태도를 돌변하는 춘향도, 매정한 춘향에 앙심을 품고 심술을 부리려다 오히려 자신들의 매정함을 후회하는 두 패두도, 춘향을 향한 욕정과 동정심을 동시에 지닌 허판수와 왈자들도, 신관 사또 ‘변악도’의 눈에 들고 싶어 한껏 치장을 하고 나이를 속이거나 거지 행색의 어사를 푸대접하는 기생도, 오직 눈앞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세태에 가장 충실한 월매도, ‘밤 잔 원수 없는’ 『남원고사』의 세계에서는 영원한 비난의 대상이 아니다. 선악을 넘어 이들 모두 현실 어디에나 존재하는 인물, 영악한 얌체 같지만 사랑스러운 깜찍함이 있고, 사납고 거칠어 보이지만 어수룩하고 순박한 구석이 있는 사람들, 매몰찬 마음과 정다운 마음, 이기적인 마음과 이타적인 마음, 엉큼한 마음과 아끼는 마음, 못난 마음과 잘난 마음을 동시에 가진 존재들이다.
『남원고사』의 작자는 시종 유머러스한 필치로 평범한 인간 군상의 이중적 면모와 함께 그들 하나하나가 가진 인생의 단면을 보여주며 때로는 거룩함의 편에, 때로는 비속함의 편에 서서 인간 존재의 의미를 생각하게 만든다. 천하의 악인이어야 할 변악도조차 종반부로 향할수록 그 악행이 부각됨에도 작품 전편에 걸쳐 밉지 않은 구석이 있는 코믹한 인물로 그려진 데서 이 세상에 절대 선인도, 절대 악인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남원고사』 특유의 시선이 확인된다. 선인 집단과 악인 집단의 치열한 대결 속에 두 진영 사이에는 그 어떤 중간지대도 있을 수 없는 세계를 보여준다는 후대 ‘완판 84장본’과 비교할 때 『남원고사』는 중간지대, 또는 회색지대에 속한 인물 군상에 관한 기록으로 기억될 만하다.
『남원고사』의 세계에는 ‘규범적 당위에 충실한 인간형’이 존재하지 않는다. 시종일관 정직하고 행실이 바른 도덕군자와 요조숙녀는 물론 전형적인 선인이나 의인 캐릭터도 존재하지 않는다. 주인공 춘향과 이몽룡을 포함하여 『남원고사』의 모든 등장인물은 규범적 시각에서 볼 때 나름의 결함을 지닌 존재여서 언제든 타인의 시선 앞에 조롱과 희화화의 대상이 된다.
사랑의 계약 문서, 훼손된 사랑일까?
『남원고사』의 세계, 19세기 중반 ‘세사난측’(世事難測)의 시대에 살던 김춘향은 첫 만남에서 이몽룡을 평생의 남자라고 확신하자마자 불망기를 요구하고, 훗날 계약이 파기된다면 이 문서를 증거 자료로 삼아 소송을 걸겠다고 했다. 춘향에게 완전히 마음을 빼앗긴 이몽룡은 기꺼이 문서를 써 주며 정실로는 맞이하지 못 해도 소실로 맞아 백년해로하겠다고 거듭 약속했다. 사랑에 계약 문서가 등장했으니, 애정소설의 전통에서 보자면 사랑의 ‘완전무결한 진실성’에 균열이 생긴 ‘훼손된 사랑’이다. 그러나 설령 출발점은 사또 자제의 위세를 빌려 기생을 불러 보고, 콧대 높은 기생으로서 권력자의 소실이 되어 호사를 누리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다 할지라도 사랑의 진실성과 순수성이 과정으로 입증되는 것이라면 춘향과 이몽룡의 사랑 또한 진실하고 순수하다.
춘향과 이몽룡은 모든 시련을 거쳐 마침내 사랑의 약속을 지켰다. 이몽룡은 당초의 약속을 묵묵히 이행했다. 서울로 간 이도령은 “은근히 저[춘향]를 위한 정이 가슴에 못이 되고 오장(五臟)에 불이 되어” 오직 춘향과 백년해로하겠다는 일념으로 과거 공부를 했고, 마침내 남원으로 돌아와 옥중의 춘향을 만났다. 춘향은 오매불망 구원해 주기를 바라던 이몽룡이 패가하여 걸식하는 신세가 된 것을 보고 절망했다. 암행어사 출도 후에 춘향은 옥에서 풀려나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이몽룡은 춘향을 “즉시 내려가 붙들고 싶으나” 정체를 감추고 춘향에게 수청을 들라고 했다. 가혹한 ‘최후 시험’이다. 하지만, 춘향은 최후의 시험에 이르기까지 끝내 목숨을 걸고 사랑의 약속을 지킴으로써 세상에서 가장 의기 있고 아름다운 ‘한 사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