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오세화 시인은 일상의 서정과 사회 현실을 섬세하게 직조하여 시의 행간에 새겨 넣는다. 가족의 일상사에서부터 소외된 노동자의 삶에 이르기까지 폭을 넓히는데, 이는 개인적 체험에서 출발하여 사회적 현실까지 아우르는 방식이다. 또, 잃어버린 고향에서부터 현 거주지인 동해지역의 구체적 현장까지 잔잔한 시선으로 훑는다. “논골담 골목에 새긴 삶의 표식들/리어카 같던 몸에 새긴 세월의 이끼”(「논골담의 푸른 옹이」)처럼 동해시의 구체적 장소를 새긴 작품들을 눈여겨볼 만하다. 「덕장 연대기」, 「묵호 어판장」, 「바다의 손자국」, 「시간의 경매」, 「오징어가 풍년이다」, 「묵호역에 가다」, 「바람의 언덕」 등에서는 소금기 묻은 동해지역 어민들의 핍진한 삶이 나타난다.
“늙고 가난한 사내에게/ 보따리 하나 들고 시집” 와서 혼자서 출산해야 했던 기구한 삶을 다룬 「통곡」이라거나, “날마다 땅을 먹고 살아도/ 배고픈 내 어머니”의 삶을 다룬 「휘어진 손가락」은 우리 시대의 고단한 삶을 환기한다. “마흔두 살에 아들을 낳았다지/ 얼마나 다행인가”(「얼마나 다행인가」)에서처럼, 자신의 서사를 숨김없이 펼쳐놓는다. 아버지 연작에서 드러나는 아픈 시절조차 천연덕스럽게 남 얘기하듯 풀어내는 것도 오세화 시인의 미덕이리라.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시간의 그늘
살갑다 13/ 도라지꽃이 피었습니다 14/ 시간의 그늘 16/ 등 굽은 달이 혼자 울고 있다 18/ 압류통지 19/ 엄마의 이름 20/ 휘어진 손가락 22/ 통곡 24/ 돈벌이 26/ 텃밭에서 익어가는 시간 28/ 이젠 살자 30/ 지워지지 않는 지문 31/ 버짐 핀 기억의 서랍 32/ 아버지와 나의 거리 34/ 장미꽃이 운 날 36/ 얼마나 다행인가 37/
제2부 바람의 지문
청약 통장 41/ 할머니의 암호 42/ 해장국 44/ 구름 꽃, 시간을 날다 45/ 열려라 참깨 46/ 난타 48/ 지렁이의 눈 49/ 포커페이스 50/ 종이비행기 52/ 바람의 지문 54/ 더는 올라갈 수 없는 경계의 선에서 55/ 늙은 아들과 늙은 아버지 56/ 여자, 달을 그리다 57/ 다행이라니 58/ 바람의 유혹 61/
제3부 사소한 높이
무인 편의점의 밤 65/ 굿나잇 66/ 디지털 정원 68/ 벽에 걸린 1평 70/ 속보 72/ 시간의 박제 73/ 기억을 부르는 스타카토 74/ 비상구를 열다 75/ 사소한 높이 76/ 콘크리트 정글 77/ 폐지와 그리움 중 어느 것이 더 무거울까? 78/ 홈쇼핑 80/ 발자국은 언제 지워졌을까 81/ 얼룩말을 탄 사내 82/ 눈물뼈가 자라나고 있다 83/
제4부 시간의 경매
논골담의 푸른 옹이 87/ 덕장 연대기 88/ 묵호 어판장 90/ 바다의 손자국 92/ 시간의 경매 94/ 오징어가 풍년이다 96/ 흐르는 강물처럼 98/ 북평 5일장 100/ 바람의 언덕 102/ 그리움을 클릭하다 104/ 전화기를 들다 106/ 문장 108/ 탄원서 110/ 묵호역에 가다 112/ 출입 금지 113/
작품해설 : 정연수(문학평론가)
푸른 옹이에 새긴 성찰과 살가운 접촉 117/
저자소개
출판사리뷰
햇빛의 발자국은 고향 문 앞에 멈춰 섰다
감꽃 목걸이를 걸어주던 감나무 집 언니
내 몸 곳곳에 새겨진 감나무
기억에 그늘이 진다
압류통지와 독촉장 고된 세상살이 되새김질하다
고향의 온기 앞에 참았던 울음이 터졌다
고향은 계절을 따라 닳고 닳았으나
허기를 느끼지 않았다
감나무 집 언니가 죽었다
감나무는 부고를 보내고 모든 잎을 떨궜다
그렇게 정정하던 우물집 아버지가 치매라더라
감나무 뒷집 엄마는 파킨슨병에 걸려 움직이지도 못한다더라
고향 소식 들릴 때마다 내 발자국이 휘청였다
두 살 터울의 감나무 집 언니가 죽었다
몸에 박힌 고향의 잔해들이 구멍 뚫린 바람으로 숭숭 날린다
시간의 그늘이 고향 모서리를 휘감는다
그림자로 가려진 고향
그리움으로 저물고 있다.
―「시간의 그늘」 전문
그리움과 상실의 감정은 흘러간 시간이 빚은 산물이다. ‘감꽃 목걸이, 감나무, 우물집 아버지’ 등이 환기하는 기억의 단편들이 쌓여 고향의 풍경을 형성한다. 동시에 “감나무는 부고를 보내고 모든 잎을 떨궜다”는 구절이 드러내듯, 상실에 대한 슬픔을 내포하고 있다. “햇빛의 발자국은 고향 문 앞에 멈춰 섰다”라는 첫 구절에서부터 “시간의 그늘이 고향 모서리를 휘감는다”라는 구절에 이르기까지 시간의 흐름이 빚은 상실과 그리움의 감정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이 시뿐만 아니라 이 시집에는 시간의 흐름이 빚은 작품들로 가득하다.
달처럼 나는 부끄러웠다
자식 넷을 둔 사내와 재혼한 엄마
매일 같이 시장 좌판에 앉아
열무, 부추, 고구마 줄기
두 단 사면 한 단 더 끼워줄게유
채소는 팔리지 않고
좌판 위에서 시들어가는 엄마
깊은 밤 등 굽은 달의 어깨가 들썩이는 모습을 보았다
채소가 시들어가는 시간 속에서
달의 눈물도 자라고
우리도 자라고.
―「등 굽은 달이 혼자 울고 있다」 전문
“자식 넷을 둔 사내와 재혼한 엄마”를 달처럼 부끄러워하던 철없는 감정은 “매일 같이 시장 좌판에 앉아” 있는 어머니의 서러운 삶을 인식하면서 성장한다. 달과 어머니를 겹쳐놓은 시적 상상력은 오 시인만의 독특한 시적 언어를 만들어낸다. “깊은 밤 등 굽은 달의 어깨가 들썩이는 모습을 보았다”라거나 “달의 눈물도 자라고/ 우리도 자라고”라는 구절은 시가 왜 문학 장르의 꽃이 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흔적의 경계에 푸른 옹이가 생겼다
빗살무늬 토기를 빚는 어달리 바다
논골담 골목에 새긴 삶의 표식들
리어카 같던 몸에 새긴 세월의 이끼
어부의 아내만 남은 골목
오징어 먹물인지 묵호항 탄가루인지
리어카 지난 길 위로 피어나는 푸른 꽃
바다와 하늘의 경계를 연다.
―「논골담의 푸른 옹이」 전문
“흔적의 경계에 푸른 옹이가 생겼다”라는 첫 행은 시간의 흐름과 변화를 암시하는데, “빗살무늬 토기를 빚는 어달리 바다”에 이르면 마을의 오랜 역사를 상기시킨다. “어부의 아내만 남은 골목”에서는 어촌의 “오징어 먹물”과 대형 저탄장이 있던 “묵호항 탄가루”의 흔적을 추적한다. 삼척-태백의 석탄은 일제강점기부터 묵호항을 통해 일본으로 수탈되었으며, 해방 이후에는 묵호항을 통해 남해를 경유하여 영월화력발전소까지 수송되었다. 태백선과 영암선이 생겨나기 이전의 석탄은 모두 묵호항을 통해 수송된 것을 환기하는 것이다. 논골담의 장소를 구체화하면서 ‘가난한 어민의 삶, 어촌 마을의 쇠퇴, 저탄과 출하장소로 기능하던 묵호항의 역사’까지 모두 짚었다. 마지막 행에서 “바다와 하늘의 경계를 연다”라고 희망을 열어둔 것은 논골담이 동해시의 새로운 관광명소로 재장소화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어촌의 삶을 다룬 「바다의 손자국」은 “50년 넘게 바다 그물을 깁는 수선집”을 통해 어민과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구성원을 그린다. “파도에 실려 온 소금기 같은 인생”이라든가, “바다의 손자국을 남기는 수선집”을 통해 수선집 노인 역시 바다와 어민을 이어주는 공동체의 일원이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주름진 세월과 낡은 그물을 함께 엮어 어촌 마을의 공동체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