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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과외 (마스크제공)

13,500 15,000
제조사
황금알
원산지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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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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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강방영의 『현실 과외』를 관통하는 정조는 늙어감과 죽음에 관한 사색의 스펙트럼이라 할 수 있을 터이다. 삶과 육체적 존재의 종말로서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자신의 유한성을 절감하는 우리가 모두 느낄 수밖에 없을 터이고, 죽음의 정점인 만큼 압도적인 무게로 우리를 짓누르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늘 기억을 통해 지나간 시절의 의미 있는 순간들을 떠올리고, 오늘을 충실하게 살아가면서 앞으로 닥칠 사랑하는 것들과의 이별을 준비하는 시인의 진술은 돌올하게 전개되고 있다. 비록 “죽음은 한 방에서 다른 방으로 건너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예이츠(Yeats)의 확신을 쉬이 가질 수는 없을 테지만, 이 시집의 시편들은 노년의 삶을 살아가는 김지이지라는 각자 삶의 “혼란에 맞서는 순간적인 버팀목”(프로스트)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목차

1부 호수

나의 시는·14
마음에서 뽑아내는 실·15
꽃구름·16
호수·17
파도·18
꿈결 바다·19
어떤 기억은·20
기억의 문·21
노래는 1·22
노래는 2·23
바람과 꽃·24
젊음·25
벚꽃 벤치·26
유채꽃 무리·27
장마 날 밤에 달·28
꿈에 밤 운전·29
바람의 채찍질·30
사랑의 오류·31
무화과·32
비행기에서·33
혼잣말·34
싱잉볼·35
너의 연주·36
외로운 고용·37
저녁·38
살아간다·39
우아한 유령·40
흐리고 작은 비 내리던 그 길·41
책의 벽 ― 시바 료타로 문학관에서·42
눈 내리는 날·44

2부 꽃다발과 달

새벽어둠·46
너의 부재·47
고통이 지나가면·48
봄비·49
비의 장막·50
비 오는 날·51
멀구슬나무 꽃·52
먼나무 멋·53
이호 바다의 저녁·54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은·55
유유히 살고자·56
옛날 사진·57
잠속 나라·58
함께 보았던 그 달·59
입원실을 나오며·60
연륜·61
하늘로 날리는 노래·62
오름에 작은 오름들·63
먼물깍·64
밤의 여행·66
꽃들이 하는 말·67
달과 지구·68
난청·69
꽃다발과 달·70
달빛 속에 갈대·72
나비의 날·73
너의 시·74
섬·75
날리는 꽃잎·76
고운 내 사람 멀고 먼 그 절에·78
기억은 먼 섬·80
지나가는 순간들이지만·82
문 닫힌 카페·83
벗에게·84

3부 귀곡잔도

귀곡잔도·86
그 절에 연못·88
삼양 해수욕장 맨발 걷기·89
바다에서·90
경계·92
경계에서·93
마감·94
학대받는 아이들·95
묘지에 목소리·96
따라비오름 가는 길에 배롱나무·98
가을 오는 저녁·100
별밤의 언덕·101
제천천주교 묘지에·102
그 집 근처·103
삼승할망의 아이들·104
꽃잎 위에서 공굴리기 ― 제주종합경기장 파크골프장에서·105
집착은 식물성·106
마음속의 그림 마을 ― 양기훈의 제주마을 백리백경 전시회에서·107
신촌 남생이못·108
그 섬 마라도·110
결혼식 전날 토가족 세 여인이 부르는 노래·113
나트랑 시내 저녁 씨클로·116

4부 노인과 지나가는 것들

노을 앞에서·118
시간의 끝·119
그냥 있을 뿐인데·120
사랑창고·121
나를 기다리는 어둠·122
푸른 녹·123
노인과 지나가는 것들·124
이별 대비 연습·125
노인·126
대가·128
시간이 드러내는 초상화·129
삶의 여관·130
노인의 비관적인 생각·131
멋진 드라마·132
현실 과외·133
웃음과 눈물의 순도·134
부고 ― 어느 문인의 부고를 받고·135
사진 삭제·136
망각·137
편지·138
동굴 같은 밤을 지나·139
제주 민요 ‘메꽃’에 붙여서·140
남자는 파도처럼·142
세 남편들의 공유 ― 아시아의 어느 고산족에 대한 방송을 보고·143
일본 어머니 ― 제주 시골마을 아들이 들려준 오래전 이야기·144
사람이란 원래 그렇다 ― 외할머니·146
‘사름은 원 경허는 거여’(사람이란 원래 그렇단다)·149
물외와 왕할머니·152
물외와 왕할망·154
안개와 나무들의 마을·156

발문 | 윤준_강방영의 제10시집 『현실 과외』를 읽고·160

저자소개


출판사리뷰

강방영의 제10시집 『현실 과외』를 읽고
윤준 (배재대학교 명예교수, 영문학)

강 선생님,
보내주신 시집 원고를 즐겁게 읽었습니다. 열 번째 시집 『현실 과외』에는 100편을 훌쩍 넘긴 시편이 실려 있군요. 아홉 번째 시집 『노을과 연금술』이 2022년 말에 발간되었으니까, 2년 만에 또 한 권의 시집으로 묶을 시편들을 써온 선생님의 열정과 부지런함에 새삼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날과 오늘의 삶을 매 순간 되돌아보며 자신이 느끼고 생각한 바를 고유한 아름다움과 질서를 갖춘 하나의 언어적 구조물로 빚어내려고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경험 윤곽들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선별하고 결합하고 조명하는 작업만큼 보람 있는 활동이 또 있겠습니까? 뜻깊은 활동의 산물로서 선생님의 시편들은 타성에 젖어 일상을 살아가는 저 같은 사람에게 스스로의 삶을 새롭게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답니다. 이 짧은 글은 선생님의 근래의 시편들과의 반가운 만남을 통해 갖게 된 저의 소소한 느낌과 생각의 편린들의 모음입니다.

*“되찾은 안개마을”

이 시집의 ‘서문’에 ‘시인의 말’에 해당하는 ‘안개마을과 어머님의 마당’을 무척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선생님의 어린 시절 고향 마을에 관한 회상기인 이 글 속의 상황과 인물들은 제4부의 「안개와 나무들의 마을」에서 조금 다르게 시적으로 변용되기도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이 서문이 미국 작가 너새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주홍글자』의 서문인 「세관」처럼 이 시집의 세계로 들어가는 중요한 입구 역할을 해주는 듯했으니까요. “딸 하나 데리고 사는 과부”인 “순옥이 어머니”, “젊은 시절” 작은 부인 “창국이 할머니”에게 밀려났다가 그 “풍파 후에” 결국 그 작은 부인과 나란히 살게 된 외로운 본부인 할머니, 마을에서 유일하게 쌀밥을 먹는 호사를 누렸던 동백나무집 늦둥이 외아들에 관한 서두의 스토리도 그 자체로 무척 관심을 끄는 서사이지만, 제주 4·3사건과 관련된 “쉬쉬하는 안개의 이야기”는 숱한 제주도민들이 겪지 않을 수 없었던 그 비극적인 사건의 가슴 아픈 여파들을 간결한 필치로 핍진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큰 나뭇가지를 쳐낼 수 있는 벌목도인 나대와 “소 판 돈”에 얽힌 장모와 사위에 관한 짧은 스토리도 단순한 일화로 보아 넘길 수 없는 서사적 박진감을 지니고요.

자주 “죽음이 삶을 후려치는 세상”에서 “어머님의 마당”은 분명히 어린 선생님을 비롯한 아이들에게는 “언제나 충만한 밤과 아늑한 낮”을 살 수 있게 해준 의미 있는 장소였겠지요. 어느 새벽에 들리던 상엿소리의 “슬프고 간절한 가락”이 상기시키듯, “안타까운 작별을 받아들여 보내고 돌아서는 법”을 배워야만 하는 상황에서 아이들은 그 마당에서 새잎이 돋고 꽃이 피는 걸 보고 들으면서 생명의 길을 찾아 나설 수 있었을 것이며. 아마 그래서 선생님은 자신의 시를 고향 마을 사람들과 “함께 부르는 노랫가락과 웃음소리로, 울려 퍼지는 햇살 속으로 들어서는 날”을 향해 나아가는 춤이자 노래라고 여기는 것일 테지요.

‘안개마을과 어머님의 마당’을 읽으면서 저는 ‘장소(place)’와 ‘장소감(sense of place)’의 존재론적 의미를 생각하게 됩니다. 사실 한 장소는 그곳에 자리한 숱한 사물들로 이루어져 있고, 우리는 그 특정한 장소를 통해 세계를 경험합니다. 많은 철학자와 인문지리학자가 주장하듯, 인간 행위의 바탕에는 특정한 장소가 있고 인간 행위는 다시 이 장소에 고유한 특성을 부여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의미 있는 장소들로 가득 찬 한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고, 인간 실존의 기초이자 개인과 그가 속한 집단의 안정과 정체성의 원천인 그 장소들에서 삶을 온갖 색채와 온갖 잠재력 속에서 경험하는 것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럴 수 있으려면 우리는 자신의 오관(五官)과 마음을 활짝 열어놓고 삶의 직접성을 경험하는 훈련을 해야겠지요. 선생님이 이 인상적인 서문에서 선명하게 그려내는 ‘안개마을’은 선생님의 개인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숱한 역사적 고난을 경험한 제주도민의 실존적 여건을 압축적으로 담고 있기도 한, 현실적이면서 동시에 상징적인 터전으로서의 원형적 ‘장소’가 아니겠습니까?

*“마음에서 뽑아내는 실”

선생님 자신의 시와 시작 행위에 관한 시편들은 이전 시집들에서도 종종 발견되지만, ‘호수’라는 표제가 붙은 제1부에서 ‘안개마을과 어머님의 마당’과 관련해 유난히 눈에 띄는군요. 「나의 시는」에서 선생님은 자신의 시를 어둠과 죽음의 배경 속에서도 꿋꿋하게 “자라는” 나무, 해마다 새로워지면서 강렬하게 “부서지는” 폭포, “자유로운 구름 따라” 떠다니며 “가슴 가득 넘치게” 안기는 “하늘 물결”에 빗대면서 늘 그런 성장과 쇄신의 가능성과 강렬함과 자유로움과 충만함을 보여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또한 동시에 그 “노래”가 “영롱하면서도 투명하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따스하고 촉촉하게 스며들 수 있는, “마음에서 뽑아내는 실”이기를 열망합니다.

자신의 시가 암석이나 지층의 틈을 통해 지표면으로 솟아나는 용천수(湧泉水)처럼 “멈추지 않고 솟아 흐르고” 나날이 새로워지는 “빛”이자 “들과 바다 또는 바람 속”(「노래는 1」)의 꽃과 새이기를 바라는 선생님은 이어지는 시편에서는 상승과 하강의 모티프를 통해 “하늘로 오르는 숱한 숨결”, “바다에 내리면서 대양으로 흡수되는 빗방울”, “심해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 소멸되는 빛”(「노래는 2」)으로 정의합니다. 날아오르려는 열망(「바람과 꽃」)과 “땅을 박차고 떠오르는 즐거움”을 문득 느끼게 되는 “청춘의 순간”(「젊음」)이 잠시 선생님의 마음을 사로잡지만, 선생님은 유채꽃을 바라보면서 봄꽃이 결국 질 수밖에 없음을, 아니 “지기 위해서” 피어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오래 이어질 길을 다시 마련하면서
꽃이 핀다 초록밭 노랗게 밝히며
지기 위해서 봄꽃은 피어난다

-「유채꽃 무리」 부분

이런 깨달음은 슬픔을 자아낼 수도 있지만, 나이 들어가는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기억 속 “멀리 간 사람들”의 “다정함”((「벚꽃 벤치」)을 더 소중하게 여기도록 하는 것이겠지요. “복잡해지지 말자”(「혼잣말」)라는 체념 섞인 혼잣말이나, 독특한 소리와 울림으로 고유의 화음을 만들어내는 명상 주발(「싱잉볼」)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외로움과 상실의 고통을 견뎌내는 선생님으로서는 어쩌면 노년을 견디는 것이 “날마다 묵은 나를 차례로 보내고/ 다시 만날 수 없는 곳으로/ 사람들을 보내는” 것에 다름 아닐 테지요. “날도 가고 사람들도 가서/ 아무도 없는 썰물의 해안에/ 낯선 또 다른 내가 닿아서/ 홀로 밀물을 기다리게 되는 것”(「살아간다」)이란 선생님의 토로는 노년을 잘살아간다는 것은 피치 못할 상실과 외로움을 잘 견디는 것이라고 믿는 제게도 각별한 의미와 울림을 갖고 다가옵니다.

*“나를 기다리는 어둠”

‘노인과 지나가는 것들’이란 표제의 제4부에서는 지나간 날들을 돌이켜보면서 사랑하는 것들과의 이별과 다가올 죽음을 연습하는 선생님의 모습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과 비슷하게 저 자신도 노년의 삶이라 “푸른 녹”에 덮인 “건너온 세상”(「푸른 녹」)이 그저 “한순간 풍경”(「그냥 있을 뿐인데」)에 지나지 않는다는, 또 앞으로 맞게 될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다는 선생님의 자각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병원에 입원하러 가는 길에 갖게 된 삶에 대한 소회를 담고 있는 「삶의 여관」을 읽으면서는 제 머릿속에 『루바이야트』에서 오마르 하이얌(Omar Khayyam)이 현세의 삶을 잠시 머물고는 곧 떠나야 하는 임시 숙소인 ‘카라반세라이’라는 여관에 빗댄 4행시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제4부 첫머리에 실린 「노을 앞에서」에서는 선생님이 이전 시집의 표제작인 「노을과 연금술」에서 경탄해 마지않았던, “진부하던 삶”을 “마법”처럼 “금빛 환희”로 바꾸어주는 연금술사로서의 노을이 아니라 “아픈 듯 슬픈 듯 텅 빈 채/ 걸음 멈추고” “하늘로 들어갈 연습”을 하게 만드는 자연 현상으로서의 노을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가슴 한구석이 시렸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여러 시편을 통해 알 수 있듯, “끝없는 어둠”(「나를 기다리는 어둠」)이 대기하고 있고 “여러 가지 이별”(「이별 대비 연습」)이 반드시 닥칠 거라는 엄연한 사실을 받아들일 준비를 늘 하면서도, 선생님에게 주어진 현재의 삶을 긍정하면서 지나온 삶이 “진정 무의미한 것이냐”(「대가」)라고 끊임없이 항변합니다. 어쩌면 “텅 빈 얼굴”과 “무표정”과 “둔감한 얼굴”(「시간이 드러내는 초상화」)만을 남기는 시간의 파괴력 앞에서 인간은 무력할 수밖에 없지만, 그런데도 오늘도 부지런히 시를 쓰는 선생님의 활동은 상실과 노쇠와 죽음으로 점철된 인간의 삶에서 가치와 의미를 찾고자 하는 끈질긴 의지와 노력의 산물 아니겠어요?

선생님이 제주 전통 신화에서 농경의 기원과 연관된 ‘자청비(自請妃)’란 여성을 예로 들면서 “지옥 같은 상황에서 방편을 짜내며/ 세상에 맞서가는 유일한 길”(「제주 민요 ‘메꽃’에 부쳐」)임을 역설하는 것도 어쩌면 바로 그런 의지와 노력이 선생님에게 더없이 소중하게 여겨졌기 때문이겠지요. 「일본 어머니」에서의 파란만장하고 곡절 많은 삶의 이야기도 제게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꿋꿋하게 견디는 이들의 삶의 가치를 긍정하려는 의도에서 제시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이 기나긴 세월 동안 인생의 간난신고를 모두 경험한 외할머니의 삶의 지혜─“사람이란 원래 그렇단다”─를 시집 끝부분에, 그것도 제주도 방언으로도 함께 제시하고 있는 것도 그런 점에서 인상적이었습니다. 문자문화에 익숙해진 우리의 의식에 제주도 방언을 통해 한층 호소력 있게 전달되는 목소리는 주변의 다른 이웃들과의 상호작용에 크게 의존하며 함께 어우러져 살던 한 공동체를 떠올릴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안개와 나무들의 마을」도 서문인 「안개마을과 어머님의 마당」에서 매력적으로 환기된 한 오래된 공동체의 삶의 속살을 흘낏 들여다보게 해준 작품이었구요.

-중략-

선생님의 시집 원고를 읽으면서 전반적으로 늙어감과 죽음에 관한 사색을 많이 접할 수 있었습니다. 삶과 육체적 존재의 종말로서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자신의 유한성을 절감하는 우리가 모두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고, 죽음의 최종성만큼 압도적인 무게로 우리를 짓누르는 것은 없겠지요. 그렇지만 늘 기억을 통해 지나간 시절의 의미 있는 순간들을 떠올리고 오늘을 충실하게 살아가면서 앞으로 닥칠 사랑하는 것들과의 이별을 준비하는 선생님의 모습을 많은 시편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제게는 작지 않은 위안을 가져다준 귀한 경험이었답니다. 비록 “죽음은 한 방에서 다른 방으로 건너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예이츠(Yeats)의 확신을 제가 쉬이 가질 수는 없을 테지만, 이 시집의 시편들은 노년의 삶을 살아가는 제게는 삶의 “혼란에 맞서는 순간적인 버팀목”(프로스트)이 되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도 삶과 죽음과 이 세계에 대한 선생님의 시적 사색이 한층 더 깊고 풍성해지기를 기원하면서 두서없는 짧은 글을 마칩니다.

시인의 말

안개마을과 어머님의 마당

고향은 안개와 나무들의 마을이었다. 해묵은 나무들 사이로 안개가 내려앉고, 그 틈새에 사람들과 초가가 있었다. 형제였던 할아버지들의 자손이 세대를 거치며 조금씩 늘어나, 제삿밥을 나누고 명절날도 집마다 돌았다. 대부분 식구는 적고 아주 외로운 집도 있었다. 딸 하나 데리고 사는 과부나 젊은 시절 작은 부인에게 밀려난 할머니, 풍파 후에 자신도 남편 없는 늙은이가 된 그 작은 부인, 그들의 오두막이 나란히 있었다. 귀뚜라미들이 까만 눈으로 올려다보는 축축한 부엌 흙바닥, 모두 보리밥을 먹는데 부모가 일부러 논을 사서 쌀밥을 먹였던 동백나무 아래 집 늦둥이 외아들만 예외였다.

쉬쉬하는 안개의 이야기도 켜켜이 내려앉아 있었다. 동네 가운데 길옆에 사는 부부는 4·3 때 당한 고문으로 정신이 어정쩡해졌다, 4·3 당시 성담 쌓고 죽창 들고 마을을 지킬 때, 우리 할아버지는 총신으로 가슴을 두들겨 맞아 그 후유증으로 일찍 돌아가셨다, 골목 안 집 할머니 등물할 때 보이는 깊은 흉터들은 식량을 내놓으라고 밤중에 달려든 폭도들이 칼로 긁어서 그렇다, 들판에서 소를 훔쳐 잡아먹으며 숨어 살던 총각은 어느 날 홀어머니를 찾아와 다투다가 어머니를 죽게 했다. 주말마다 시아버지가 도시에 사는 아들의 며느리만 불러서 일을 시켰는데, 그 며느리는 농약 먹고 죽었다. 장모에게 소를 팔라고 해서 돈을 치른 사위가 이르기를 베개 밑에 돈을 놓아서 베고 그 옆에 큰 나대를 두고 주무시라고, 시킨 대로 했던 그 날 저녁 집에 도둑이 침입하고, 놀란 장모가 나대를 휘둘러 쫓아낸 후 딸네 집으로 달려갔는데, 그 밤중에 불이 켜져 있고 손 다친 사위에게 딸이 약을 발라주고 있어서, 그대로 발길 돌려서 집에 왔다. 어떤 사람은 며칠이나 안 보이는 이웃 할머니 행방이 궁금해서 물어보러 그 아들 집에 갔다가 오려는데, 잿막에 모아둔 잿더미 가운데로 흰 옷고름이 살짝 보였다.

그러나 아이들은 어머니의 마당에서 언제나 충만한 밤과 아늑한 낮을 살았다. 지붕은 어두운 산에 안겨서 바닷물처럼 깊은 잠속에 잠겼으며, 들에 나는 산새들처럼 아이들은 햇살과 바람 속에서 놀았다. 하늘에서 시간을 재는 푸른 별들과 가끔 짖는 검둥개가 그들의 수호신이었다. 지네 잡으러 달래 캐러 고사리 꺾으러 산으로 들로 달리던 아이들, 그중에 몇은 마을을 감아 흐르는 내에 물귀신이 홀려서 가버렸다.

며칠을 앓았던 어느 새벽 어머니 옆에서 반쯤 깨어 꿈결인 듯 들었던 노래, 여러 목소리가 어우러진 그 노래는 멀어지다가 사라졌다. 그 슬프고 간절한 가락이 너무나 궁금하였으나 어머니는 더 자라고 할 뿐 답을 주지 않으셨다. 자라서 생각해 보니 상여를 옮기던 사람들의 노래였던 것 같았다. 마을 뒷동산에 상엿집이 있고 그 옆에는 알록달록 헝겊 조각을 달고 당나무도 서 있었다. 거기 딸기가 아무리 탐스럽게 붉어도 아이들은 다가가서 따는 법이 없었다. 무엇인가 신비하고 무섭고 섬뜩한 기운이 도사리고 있는 듯 오싹하여 멀찌감치 돌아서 지나갔다.

옛날 사람도 이야기도 다 사라진 지금, 허물어진 오두막과 베어진 나무들로 풍경도 길도 없어져서 갈 수 없는 곳, 이 세상에서 사라진 그 마을은 하늘 속에 구름숲이나 호수 옆으로 옮겨갔을지 모른다. 안개마을 밖은 죽음이 자주 삶을 후려치는 세상이다. 세상일은 더 빠른 물살로 바위에 부딪히며 급하게 흐르고, 그 물가에 비켜서서 생명의 나무에 잎이 갈리고 꽃이 피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는 어렵다. 그래도 온 우주를 다 가진 듯 어린아이들은 충만하여서 노래 부르며 새롭게 삶을 씻는다. 예기치 않은 순간 찾아와 밀물처럼 범람하는 작별의 아픔, 칼을 갈며 우는 바람과, 가혹한 어둠에 허황된 조명만 비추는 도시, 그 속에서도 생명은 길을 찾아 나간다.

한때 물러갔던 바다는 죽음으로 되돌아오고, 해안선을 가득 채우는 어둠이 오면 안타까운 작별을 받아들여 보내고 돌아서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안개 속에는 몇천 년 전부터 아이들이 숨죽여 울었고, 묻힌 뼈들이 신음하는 어둠은 그 무엇으로도 밝아지지 않는다. 천 개의 만 개의 바다 문을 열어 흰 갈기 나부끼는 말들을 불러내는 바람처럼, 발을 구르고 하늘을 찢으며 홀로 외치는 고통의 질주 속에서도, 슬픔으로 비 내리는 회색인 날에도 어른이 된 아이는 다시 아이를 데리고 어린 시절을 찾아간다. 어디에 둥지를 틀었든 집을 찾아 날아야 한다. 흐려진 마음이 문 닫고 쓰러져 캄캄한 잠을 청할 때도 어디에서인지 일어나라는 속삭임이 들려온다.

나의 삶에 연결된 사람들 중에는 불이 되어 삶을 고통으로 달구거나, 돌 같은 가슴과 절벽 같은 완강함으로 뻗어 나가려는 나의 의지를 저지하는 벽 같은 역할도 한다. 절망의 바다로 떨어지는 일도 있지만 반대로 자라나는 기쁨도 만난다. 이승에서도 저승에서도 나를 기다려 줄 것 같은 사람들은 다시 만나기를 갈망하게 한다. 멀고도 추운 땅, 바람 쓸쓸한 가시덤불 위에 얇은 햇살 구슬프고, 지저귀는 새 한 마리 없이 바닷소리도 없이 바위들이 영생을 되풀이하는 땅, 그곳을 지나고 나면 달빛 푸른 곳 하얀 길 위에 아이들이 놀고, 다시 갈 수 없던 끊어진 길 너머에 다다를 날이 올 것만 같다. 한순간 드러나는 신비한 빛처럼 어느 계곡에서 건너오며 부르는 소리처럼, 돌아가고 다시 돌아가는 꿈속의 마을 그 길에 집들, 어두운 밤도 아니고 환한 대낮 또한 아닌 어떤 시간에 드디어 마중 나올 사람들, 그들과 함께 부르는 노랫가락과 웃음소리로, 울려 퍼지는 햇살 속으로 들어서는 날, 나의 시는 그날을 향해 나가는 춤이며 혼자 부르는 노래이다. 되찾은 안개 마을에는 다시 까마귀와 말똥가리와 꿩과 참새와 오소리와 개와 돼지와 닭들과 뱀과 쥐와 고양이와 삵이 달빛 속에 그림자로 스며들어 사람들과 어울려 함께 놀 것이다.

2024년 여름
강방영

상품필수 정보

도서명
현실 과외 (마스크제공)
저자/출판사
강방영 ,황금알
크기/전자책용량
128*210*12mm
쪽수
176쪽
제품 구성
상품상세참조
출간일
2024-10-31
목차 또는 책소개
상품상세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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