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네덜란드 교회의 신앙고백이면서, 개혁 교회의 세 일치 신조 중 하나인 「벨직 신앙고백서」의 저자 귀도 드 브레! 루터나 칼뱅만큼 유명하진 않지만, 여러 저작과 목회를 통해 종교개혁을 이끌면서 순교까지 당하여 큰 귀감이 되고 있는 목사이자 신학자이다. 지금껏 「벨직 신앙고백서」에 대한 연구나 해설서 출간이 지속되곤 있지만, 그 저자인 드 브레에 관한 연구는 매우 미진했다. 그의 삶을 언급하며 짧게 조명한 책은 있었지만, 그의 생애 전반을 다룬 ‘전기’는 없었다. 따라서 『순교자 귀도 드 브레의 생애』는 드 브레의 한국 최초 전기라 할 수 있다. 네덜란드에서 유학하며 귀도 드 브레를 전공한 저자가 드 브레의 삶과 신앙, 그리고 그의 저작들을 일목요연하게 소개하면서 지금의 우리 신앙과 우리 교회를 돌아보게 한다. 2차 자료에 의지하기보다 드 브레의 저술을 토대로 삶을 추척했고, 생전 거주지와 사역지를 직접 탐방하면서 찍은 사진들까지 책에 담았기에 보다 신빙성 있게 드 브레의 생애를 들여다볼 수 있게 했다. 박해받는 성도들의 목사, 가르치고 변호하고 순교한 사람 귀도 드 브레! 진리와 생존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한국 교회와 목회자, 성도들이 본서를 통해 큰 유익을 얻을 거라 확신하며, 본서를 추천한다.
목차
추천사
1. 프롤로그
2. 드 브레가 살았던 시대(1522-1567년)와 장소(저지대)
3. 드 브레의 유년 시절: 로마교회의 오류를 깨닫다(1522-1548, Mons)
4. 개혁 교회 목사로 준비되다(1548-1552년, London)
5. 첫 번째 사명을 확인하다: 개혁 교회 성도들을 가르치는 사역(1552-1555년, Lille)
6. 잘 가르치기 위해 잘 배우기를 택하다(1555-1559년, Lausanne / Geneva)
7. 두 번째 사명을 확인하다: 개혁 교회를 변호하는 사역(1559-1561년, Tournai)
8. 개혁 교회와 성도들을 향한 멈출 수 없는 사랑(1562-1566년, Sedan)
9. 가르치고 변호하다가, 순교하다(1566-1567년, Valenciennes)
10. 에필로그
부록 1. 귀도 드 브레의 ‘아내에게 쓰는 편지’
부록 2. 귀도 드 브레의 저술 연구 안내
참고문헌
저자소개
출판사리뷰
(전략) 1816년 이후 네덜란드 국가교회(de Hervormde Kerk)는 계몽주의와 자유주의의 영향으로 변질되어 갔고, 이에 반감을 품고 있던 이들이 1834년, 국가 개혁 교회로부터 분리(de Afscheiding)하여 새로운 개혁 교회(de Gereformeerde Kerk)를 형성하였는데, 이때 분리해 나온 성도들이 그들의 신앙의 기준으로 삼았던 것이 또다시 벨직 신앙고백서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도르트 신경이었다. 1886년,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가 국가 개혁 교회로부터 분리해 나올 수밖에 없는 애통(de Doleantie)을 외칠 때도, 앞서 말한 세 문서를 ‘우리가 돌아가야 하는 기준점’으로 삼았다. 이처럼 네덜란드 개혁 교회에서 이 세 문서는 그들의 신앙적 위치가 어디에 있는가를 돌아볼 때마다 그 기준이 되는 문서였다. 그중에서도 벨직 신앙고백서는 그들이 믿는 바가 무엇인지를 서술하고 있기에 네덜란드 개혁 교회 신앙의 근간이 되는 문서라 할 수 있다.
벨직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사람, 귀도 드 브레(Guido de Bres, 1522-1567)는 네덜란드 남부 지역(현 벨기에 남부 지역) 일대에서 활동하던 종교개혁자로, 스페인에 의해 핍박받던 조국의 개혁 교회를 섬기는 데에 그의 온 인생을 바쳤던 목회자였다. 20대 중반에 개혁 신앙을 받아들인 드 브레는, 평생을 그의 조국에 있는 성도들을 가르치고 섬기는 일에 헌신하다가 45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그는 개혁 신앙이 성경이 말씀하는 바를 가장 잘 이해하는 신앙이라 확신했기에 그의 조국에 ‘성경적인’ 개혁 교회를 세우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다. (중략) 개혁 신앙을 변호하고 개혁 교회 성도들을 가르치는 드 브레의 사역은 가혹한 박해 가운데 이루어졌다.
당시 네덜란드는 합스부르크 제국에 속해 있었는데, 이미 독일의 영토에서 루터에게 동조하는 제후들로부터 한 차례 충격을 받은 카를 5세 황제는 네덜란드 영토만큼은 개신교도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1523년 7월 개신교의 첫 순교자가 발생한 곳도 네덜란드(현 벨기에)의 브뤼셀이었고, 네덜란드는 종교개혁 기간에 서유럽에서 가장 많은 박해와 핍박이 이루어진 지역이었다. 1556년, 스페인 왕으로서 네덜란드 영토를 물려받은 그의 아들 펠리페 2세도 네덜란드가 오직 로마 교회로 통일되는 방향으로 종교 정책을 펼쳤다. 그에게 개신교도는 그의 왕국을 분열하는 반역자일 뿐이었고, 그의 통치하에서 개혁 교회는 끊임없이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드 브레가 돌보았던 성도들은 바로 그러한 박해 가운데 있는 성도들이었다. 로마 교회와 다른 신앙을 갖고 있다는 것이 발각되면 끌려가 심문을 받아야 했고, 심한 경우 온 가족이 공개적으로 처형을 당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드 브레의 사역은 개혁 교회 성도들의 신앙이 성경에 근거하고 있음을 변호하는 것이었다. 그의 성도들로 하여금 개혁 교회의 신앙이 새롭게 발생한 이단이 아니라, 오히려 로마 교회의 전통이 비(非)성경적인 고안물임을 당당하게 설파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드 브레는 로마 교회가 거짓 교회라 해서 무질서하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무너뜨리는 것은 성경적인 개혁 신앙의 모습이 아님을 보여 주려고 노력하였다. 그의 생각에 개혁신학의 교리들은 결코 비합리적이거나 무질서하거나, 혹은 폭력적인 것으로 나타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런 방식으로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려는 극단적인 무리와 분명한 선을 그었고 그의 성도 중에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무질서한 방법으로 위정자들에게 반기를 들려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성경적인 개혁 신앙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중략) 그렇게, 그에게 주어진 양 떼를 온 마음으로 사랑하며 종교개혁자와 목회자의 길을 걸어가던 드 브레는 결국 1567년 5월 31일, 그가 사랑하던 성도들이 보는 앞에서 순교자가 되었다.
필자의 학위 논문 지도교수였던 이어릭 더 부어(Erik A. de Boer)는 드 브레가 오랫동안 잊혀 온 것을 안타까워하며 그 이유가 무엇일까 물은 적이 있다. 45세에 순교하여 사역의 기간이 비교적 짧았던 탓일까? 아니면 핍박 속에 평생을 이리저리 도망치며 살았기에 칼뱅의 제네바와 같이 강력한 근거지를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일까? 드 브레는 네덜란드 개혁신학의 근간이 되는 벨직 신앙고백서를 저술한 인물임에도 다른 종교개혁자들에 비해 주목을 받지 못했다. 다행히 한국 교회에도 벨직 신앙고백서 출판 450주년(2011년)을 기점으로 벨직 신앙고백서에 대한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제는 그 저자인 귀도 드 브레의 삶에도 주목할 때가 되었다. 개혁 신앙을 받아들인 후에, 그의 조국의 성도들에게 개혁 신앙을 전하고 가르치기 위해 평생을 사역하고, 개혁 신앙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 드 브레의 삶 이야기가 개혁신학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본보기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특히, 그의 성도들에게 ‘바른’ 신앙을 가르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여겼던 그의 모습은 오늘날 목사의 사명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이들에게 큰 도전을 줄 것이다. 더 나아가, 진지하게 공부하고 고민한 끝에 개혁 신앙이 가장 성경적이라고 결론을 내린 뒤에는 그 신앙을 자신의 목숨보다도 소중하게 여겼던 드 브레의 삶이 바른 신앙과 참된 예배를 갈망하는 성도들에게도 감동과 모범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