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산시로의 실제 모델인 고미야 도요타카의 해설
시골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쿄의 대학에 들어간 산시로가 새로운 환경에 접한다. 그리고 동년배와 선배와 젊은 여성과 접촉하며 여러 가지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손이 가는 일이라고는 이 분위기 속에 이 사람들을 풀어놓는 것뿐이다. 나머지는 사람들이 멋대로 헤엄쳐서 저절로 파문이 일리라 생각한다. 그러는 동안에 독자도 작자도 이 분위기에 휩싸여 이 사람들을 알게 되리라 믿는다. 만약 휩싸일 만한 가치가 없는 분위기에, 알아도 보람이 없는 사람이라면 서로 불행했던 것이라고 단념할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그저 심상할 뿐이다. 희한한 것은 쓸 수 없다. ― 나쓰메 소세키의 「산시로 예고」
목차
산시로 예고
산시로(본문)
해 설(고미야 도요타카)
저자소개
출판사리뷰
나쓰메 소세키가 묘사한 여성의 수수께끼!
나쓰메 소세키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산시로』는 우리에게 성장소설, 혹은 풋풋한 첫사랑을 그린 청춘소설 정도로만 알려져 있는 듯하다. 그러나 『산시로』에 대해서 이야기한 나쓰메 소세키 자신의 말을 들어보면 조금은 다른 해석의 길이 보인다.
[이는 여자가 남자를 추구하는 것인데, 그 여자인 펠리시타스에게는 남편이 있습니다. 유부간[有夫姦]이 되기에 남자 쪽에서 늘 피하려 합니다. 그를-육체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좇고 또 좇아서 포로로 삼는 방법이 참으로 교묘해서, 어떻게 저런 식으로 상상할 수 있었을까 놀랄 정도로 적혀 있습니다. 그 누구도 그런 전개를 만들어낼 수는 없을 겁니다. 그리고 이 여자가 매우 영리하고 섬세한 성격입니다. 나는 이 여자를 평하여 ‘무의식적 위선가’-위선가라고 번역해서는 좋지 않지만-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 교언영색[巧言令色]이 애써 노력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무의식적으로, 타고난 성격을 그대로 표현하여 남자를 사로잡는다는 점, 물론 선이네 악이네 하는 도덕적 관념도 없이 행하는 것이라 여겨지는데, 그런 성질을 그 작품만큼 그린 것이 어디에 또 있을까요? -아마도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라고 말하고 다시 뒤를 이어서, [『산시로』는 길어질까 물으시는 겁니까? 글쎄요. 길게 끌고 가는 겁니다. 그럼, 무엇을 쓸 것이냐고 물으신다면 또 난처해집니다만. -사실은 지금 말씀드린 그 펠리시타스 말인데, 이것을 상당히 오래 전에 읽고 재미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집에 있던 모리타 하쿠요(森田 白楊)가 부지런히 소설을 쓰고 있기에, 그렇다면 나는 예의 ‘무의식적 위선자’를 써보겠다고 반은 농담처럼 말하자, 모리타가 써보십시오, 라고 말했으니 모리타에 대해서는 그런 여자를 써보일 의무가 있습니다만, 다른 사람에게 공언한 것은 아니니 어떤 여자가 되든 상관없으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어떤 여자가 될지는 나도 모릅니다. 또 지금 이야기한 중층적 서술만으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곁가지도 들어오기에 여자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고 말하면 무책임한 듯하지만,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주더만을 끌어들여서 놀려서는 안 됩니다.] - 『와세다 문학』 소세키의 담화 필기 중에서
각자 다른 청춘의 모습을 통해서 나쓰메 소세키는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 책을 통해서 살펴보시기 바란다.
해설 중에서
중학 교사들의 생활 상태를 들어보면 모두 딱한 사람들뿐이지만, 참으로 가엾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사자들뿐이다. 왜냐하면 현대인은 사실을 좋아하지만, 사실에 수반되는 정서는 잘라내버리는 습관이 있기 때문이다. 잘라내버리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세상이 절박하기 때문이니 어쩔 수가 없다. 그 증거로 신문을 보면 알 수 있다. 신문의 사회면 기사는 열에 아홉까지가 비극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비극을 비극으로 맛볼 여유가 없다. 그저 사실에 대한 보도로 읽을 뿐이다. 내가 구독하는 신문에서는 사망자 10여 명이라는 표제로 하루 사이에 변사한 사람의 연령, 호적, 사인을 6호 활자로 1행씩 싣는 경우가 있다. 간결함과 명료함의 극치다. 또 도둑 조견[早見]이라는 난이 있어서, 어디에 어떤 도둑이 들었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도둑이 모여 있다. 이것도 지극히 편리하다. 모든 것이 이런 식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직도 마찬가지다. 당사자에게는 비극에 가까운 일일지 모르겠으나, 타인에게 그렇게 통절한 느낌을 주지는 못한다고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요함에 갇혀버린 미네코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부채로 이마 부근을 가리고 서 있는 모습 자체가 이미 그림이었다. 산시로가 보기에 하라구치 씨는 미네코를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불가사의하게 깊이가 있는 그림에서 그 깊이만을 있는 힘껏 뽑아내어 평범한 그림으로 미네코를 다시 그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의 미네코는 이 고요함 속에서 점차 제1의 미네코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산시로에게는 이 두 명의 미네코 사이에 시계 소리가 닿지 못하는 고요하고 긴 시간이 함축되어 있는 듯 여겨졌다. 그 시간이 화가의 의식에조차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조용히 흐름에 따라서 제2의 미네코가 마침내 뒤를 따라온다. 이제 곧 양쪽이 딱 만나서 하나가 되기 직전에 시간의 흐름이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영원 속으로 흘러가 버린다. 하라구치 씨의 브러시는 거기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따라서 산시로의 머릿속에 있는 미네코의 모습은 언제나 실제보다 확대되어 움직이고 있는 데 반해서, 미네코의 머릿속에 있는 산시로의 모습은 실제보다 축소되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미네코가 보고 있는 산시로는 미네코가 느끼고 있는 산시로보다 존재감이 옅었다. 적어도 반성을 하고 볼 때에는, 산시로를 사랑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반성하지 않을 때에는, 혹은 반성의 건너편에서는 틀림없이 산시로를 사랑하고 있다. 그것이 산시로에 대한 미네코의, 산시로를 놀리고 있는 것 같은, 산시로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 같은, 산시로를 떼어내려는 것 같은, 산시로에게 의지하려는 것 같은, 여러 가지 예측할 수 없는 태도가 되어 나타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