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구속, 무죄, 유죄, 선고, 징역, 재판, 형량… 형사법정에 올라온 사건들은 주로 한 단어나 문장으로 정리된다. 법정 밖 사람들에게 형사법정은 유무죄를 가리는 곳에 지나지 않지만, 기사 한 줄과 형량 너머 법정에는 뭉개지고 흐려진 ‘얼굴들’이 존재한다. 『어떤 양형 이유』로 독자를 눈물 흘리게 했던 박주영 판사는 다양한 이유로 형사법정에 오게 된 얼굴들의 서사를 기억하기 위해 코를 끅끅 삼키며 쓰고 또 썼다.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지었던 그가, 『법정의 얼굴들』에 말과 글로 빚어낸 눈물겨운 위무를 담아냈다.
목차
프롤로그
1장 회복 불가능한 상실을 견디는 사람들
혼잣말하는 사람들
마지막 호명
라 요로나
가난이 모르는 것들
단 한 사람
2장 세상은 매일매일 더 좋아지고 있는가
뷰티풀 보이
처음 듣는 말
단약한 의지
삼정목 왼쪽
월식
3장 사람을 살리는 이념과 정의
우린 양아침니더
여러분이 법입니다
발 좀 치우시죠
심증
판사와 글쓰기
싸움의 기술
에필로그
저자소개
출판사리뷰
세상의 프레임 바깥에 존재하는 법정의 얼굴들
죽은 자를 기억하며 산 자를 재판하는 판사의 글짓기
★ 소설가 장강명 추천
회복 불가능한 상실을 견디는 사람들
피해가 들끓는 세상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최선의 태도
2019년 말 『법정의 얼굴들』의 저자인 박주영 판사는 ‘자살방조미수’ 사건을 처리하게 된다. 그는 20대에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했던 피고인들을 살게 하기 위해 사회의 관심을 촉구하는 판결문을 썼고, 피고인들에게 법의 언어가 아닌 한 사람의 간곡한 부탁을 담은 ‘당부의 말씀’이라는 말을 따로 전하기도 했다. 차갑고 무거운 법정에 선 어린 피고인들을 눈물 흘리게 한 이 판결문은 당시 큰 화제가 됐고 여전히 회자되며 많은 이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저자는 법정에서 이런 이들의 얼굴을 계속해서 봐왔다. 감당할 수 없는 상처를 끌어안다 스스로를 해한 청년, 사랑받아야 할 보호자에게 맞아 생명을 잃은 아이, 장기간 성폭행을 당한 여고생, 돈이 없어 교도소에 들어가려는 노인··· 이들의 삶은 아예 설명되지 않거나 ‘편의점에서 빵 훔쳐··· 징역 1년’처럼 기사 헤드라인 한 줄로 언급될 뿐이다. 그러나 당사자들이 세상에게, 보호자에게, 대물림된 가난에게 받은 피해는 평생을 간다. 결국 회복 불가능한 상실을 견디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런 이들이 끊임없이 돌아나오는 회전문 같은 현실을 바꿀 수는 없는 걸까? 저자는 “서사가 풍부하고 넓을수록 서정도 크고 짙어진다. 결국 우리가 먼저 할 일은 묘사할 수 없는 서정을 상상하고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묻혀 있는 수많은 서사를 추적하고 발굴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안타깝고 슬픈 감정으로 잠시 소비되고 마는 피해의 이면에는 구체적인 삶의 서사가 존재한다. 우리가 취할 최선의 태도는 보이지 않는 서사를 꼼꼼히 기록하고 함께 아파하는 것이다. “뉴스가 없으면 문제도 없다. 서현이, 정인이, 김용균, 이스라엘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은, 그들의 죽음을 기록하고 알리는 것이다. 사회적 공분도, 적절한 처벌도, 법률과 의료 시스템의 개선도 그 후 뒤따라온다.”
세상은 매일매일 더 좋아지고 있는가
악의 노림수를 피하는 방법
저자가 마주하는 형사사건에는 “정의와 불의, 가해와 피해, 개인적 책임과 사회적 책임 같은 여러 맥락이 어지럽게 뒤엉켜” 있다. 정신질환을 앓다 엄마를 죽인 피고인은 자신이 누구인지 발 딛고 선 곳이 어디인지도 몰랐고, 비행을 저지르고 법정에 선 아이는 초등학생 때부터 집 밖을 떠돌 수밖에 없던 처지였다. 같은 죄를 지어도 보호자가 없는 아이들은 소년원에 가고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집으로 간다. 약물에 중독된 피고인은 필사적으로 마약을 끊어보려 했지만 함정수사에 걸려 다시 법정에 선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주로 악마나 괴물에 비유되곤 한다. 저자도 법정은 “온갖 악이 흘러드는 바다 같은 곳”이라고 표현할 정도다. 그러나 영화 〈조커〉의 ‘아서’가 날 때부터 ‘조커’가 아니었듯 법정에 선 모든 악도 처음부터 거악이었던 것은 아니다. 오로지 아래로만 향하는 질기고 비열한 폭력, 아프고 병든 사람들을 모른 체하는 걸 넘어 조롱하거나 비난하는 사람들, 가난뿐만 아니라 범죄도 대물림되는 현실이 실재하는 세상에서 악은 조금씩, 서서히 발현된다.
법정에는 거악이 파도처럼 넘실대지만 법정 밖에는 곳곳에 악이 널려 있다. 우리 모두의 본성에 악이 내재돼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우리 내면과 주위에 무수히 포진한 크고 작은 악에 맞서 흑화하지 않으려면 “공감능력과 양심, 죄의식과 염치 같은 것들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나는 저런 악마들과 다르다고,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언제나 중요한 건 악을 자각하는 일”이어서다. “악과 불의를 식별하고 악행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내가 누굴 가리거나 밟고 있는 건 아닌지, 나 때문에 누가 고통을 겪는 건 아닌지, 사실은 내가 사기꾼 로봇이 아닌지 항상 경계하고 돌아봐야 한다. ······악이 진정으로 노리는 건 선이 계속 악을 모른 채 살아가는 거다. 선이 악을 깨닫는 순간 악은 ‘펑’ 하고 사라진다.”
사람을 살리는 이념과 정의
조금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다는 욕망
형사법정에서 판사가 하는 일은 법대로 판단해 유무죄를 가리는 일이다. 갈등이 폭발해 법정까지 오게 된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판사가 내 편을 들어줄지다. 판사를 내 편으로 만들기 위해 어떤 사람들은 판사의 법정 밖 사생활과 살아온 과거까지 알아내려 한다. 각자의 이유로 법정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표정과 눈빛으로 판사에게 묻는다. “너는 어느 쪽이냐?” 소리 없는 아우성에 휩싸인 판사는 판결문에 머리를 처박고 만다.
세상의 아우성은 더 크고 요란하다. 자유냐 평등이냐, 성장이냐 분배냐, 페미냐 아니냐, 동성애 지지냐 반대냐, 명분이냐 실용이냐··· 언제든 이쪽이 아닌 저쪽에 서 있을 수 있지만 우리는 편을 가르고 진영을 나눈 뒤 집요하게 따져 묻는다. “너는 어느 쪽이냐?” 하지만 “매일 누군가 학대당하고 살해되는 숨 가쁜 현장에 있는” 저자에게 페미니즘이 고담준론이 아니듯, 폭력이 판치는 세상에서 중요한 건 모두가 힘을 합쳐 범죄를 막고 생명을 지켜야 하는 일뿐이다. 서로 내가 옳다며 싸우고 모두가 불의해서 정의가 사라진 부조리한 사회를 건너기 위해 가져야 할 올바른 입장은 어떤 모습일까? 저자는 “불의한 세상에서 홀로 싸우는 개인을 방치하지 않는 것, 단 한 명도 희생시키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갈등이 첨예하고 혐오와 증오가 충만한 시대의 이념은 사람이어야만 한다. 『법정의 얼굴들』을 읽은 독자들은 알게 될 것이다. 결국 우리가 욕망해야 할 건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세상뿐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