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경찰이 성평등 관점을 지니고 있지 않을 때 우리 사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경찰은 여러 정부 부처들 가운데서도 특히 시민의 가까이에서 안전을 책임진다. 그런 경찰에 성평등 관점이 부재한다면, 각기 다른 성별과 성 정체성 등을 지닌 다양한 시민들이 일상의 여러 측면에서 차별을 겪게 될 것이며, 범죄 등 위험 상황에 처했을 때도 동등하게 안전을 보장받지 못할 것이다.
여성단체의 쉼터에 가정폭력 가해자가 난입했을 때 피해자를 보호하기는커녕 가해자의 편에 서거나, 이른바 ‘n번방 사건’, ‘딥페이크 사건’으로 불리는 디지털 성범죄 수사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등 경찰은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들의 목소리에 충분히 귀 기울이지 않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여왔다. ‘#경찰이라니_가해자인줄’ 해시태그 운동이나, 디지털 성범죄 및 그에 대한 경찰의 편파 수사를 규탄한 2018년 혜화역 ‘불편한 용기’ 시위는 이렇게 성평등 관점은 물론 기본적인 인권 의식을 결여한 경찰 행정 및 수사 방식에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시민들의 저항 행동이었다.
이 책은 그런 경찰 조직을 근본적인 차원에서부터 변혁해야 한다는 문제의식 아래 모인 페미니스트 행정가 및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2018년 3월 30일 경찰청은 미투운동의 흐름과 문제의식을 기민하게 인지하며 중앙행정기관 최초로 여성정책이 아닌 성평등정책 전담부서를 신설하는 꽤 급진적인 선택을 했다. 이 책의 기획자 겸 저자로 경찰청 성평등정책담당관실 부서장을 맡았던 여성학자 이성은을 비롯해 페미니즘을 기반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는 9명의 저자들은 경찰 구성원들과 협업하며 다양한 성평등정책을 수립했고, 치열한 젠더 거버넌스를 통한 실질적 변화를 일궈냈다. 이 책은 그 협업에 대한 생생한 기록으로, 경찰이 성평등 관점을 잃지 않도록 시민들이 계속해서 지켜보고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제안한다.
목차
기획의 말 5
1부 젠더 거버넌스로 소통하다
경찰이 열어갈 성평등 대한민국? _이성은 18
해임 위기를 극복하고 이뤄낸 성별통합모집 _이성은 34
형식적인 거수기에 머무르지 않았던 경찰청 성평등위원회 _이경환 52
2부 성평등정책을 실천하다
경찰청의 성평등 목표는 어떻게 수립되었는가 _주재선 70
경찰 업무를 성평등하게 바꾸는 매일의 협업 _김창연 88
경찰서 곳곳에 숨겨진 공간의 정치 _이해리 106
3부 함께 배우며 경험하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기까지 _정혜심 128
성평등한 경찰이 시민과 호흡할 수 있다 _이임혜경 148
경찰 관리자 성평등 교육, 변화의 시작 _이은아 166
여성혐오에 맞서는 경찰관들을 만나다 _추지현 188
부록 성평등 용어 사전 210
저자소개
출판사리뷰
지금 경찰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경찰 조직의 개혁과 성평등 관점을 위해
경찰청 안으로 용감히 걸어 들어간
페미니스트 9인의 생생한 기록
경찰이 성평등 관점을 갖는 것은 왜 중요할까? 아니, 질문을 이렇게 바꿔보자. 경찰이 성평등 관점을 지니고 있지 않을 때 우리 사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경찰은 여러 정부 부처들 가운데서도 특히 시민과 가까이에서 호흡하며 시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조직이다. 그런 경찰에 성평등 관점이 부재한다면, 각기 다른 성별과 성 정체성 등을 지닌 다양한 시민들이 일상의 여러 측면에서 차별을 겪게 될 것이며, 범죄 등 위험 상황에 처했을 때도 동등하게 안전을 보장받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그런 일들을 여러 차례 겪은 바 있다. 여성단체의 쉼터에 가정폭력 가해자가 난입했을 때 피해자를 보호하기는커녕 가해자의 편에 서거나, 이른바 ‘n번방 사건’, ‘딥페이크 사건’으로 불리는 디지털 성범죄 수사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등 경찰은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들의 목소리에 충분히 귀 기울이지 않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여왔다. ‘#경찰이라니_가해자인줄’ 해시태그 운동이나, 디지털 성범죄 및 그에 대한 경찰의 편파 수사를 규탄한 2018년 혜화역 ‘불편한 용기’ 시위는 이렇게 성평등 관점은 물론 기본적인 인권 의식을 결여한 경찰 행정 및 수사 방식에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시민들의 저항 행동이었다.
이 책은 그런 경찰 조직을 근본적인 차원에서부터 바꿔야 한다는 문제의식 아래 모인 페미니스트 행정가 및 전문가 9인(이성은, 이경환, 주재선, 김창연, 이해리, 정혜심, 이임혜경, 이은아, 추지현)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2018년 3월 30일 경찰청은 미투운동의 흐름과 문제의식을 기민하게 인지하며 중앙행정기관 최초로 여성정책이 아닌 성평등정책 전담부서를 신설하는 꽤 급진적인 선택을 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경찰은 조직 내부 구성원이 아닌 외부 페미니스트 정책 전문가를 기용해 젠더 거버넌스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고, 이 책의 기획자 겸 저자인 여성학자 이성은이 성평등정책담당관실의 부서장으로 임명되었다. 성평등 관점을 도입해 보수적이고 남성중심적인 경찰 조직을 대대적으로 개혁하는 젠더 거버넌스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후로 2023년까지 5년간 그 젠더 거버넌스의 핵심을 담당했던 페미니스트 행정가들 및 전문가들은 성평등정책담당관실과 성평등위원회를 주축으로 다양한 정책을 수립하면서 여러 경찰 구성원들과 적극적으로 협업해나갔고, 경찰 조직 곳곳에 성평등 관점을 도입하며 실질적인 변화를 이뤄냈다. 지난했지만 성공적이었던 그 협업에 대한 생생한 기록인 이 책은 경찰이 앞으로도 성평등 관점을 잃지 않도록 시민들이 계속해서 지켜보고 변화를 촉구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경찰, 정부기관 최초로 젠더 거버넌스를 위한 발판을 마련하다
젠더 거버넌스젠더 거버넌스gender governance란 정책 및 행정 분야에서 성주류화gender-mainstreaming를 이루기 위해 공무원, 시민, 전문가 삼자가 협력해 정책의 구체적인 성과를 만들어내는 일련의 과정을 가리킨다. 현재 서울시를 비롯한 지방 행정에서 실시하고 있는 여성안심귀갓길 사업이 가장 대표적인 젠더 거버넌스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경찰은 지난 2017년 문재인 정부가 내건 사법권 개혁의 일환으로 출범하게 된 경찰개혁위원회를 통해 이미 “성평등한 경찰로의 변화를 위한 개혁 방안”을 권고받은 바 있었다. 심지어 그보다 훨씬 더 오래전인 2005년에도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헌법의 평등권에 위배되는 경찰 성별분리모집을 성별통합모집으로 개선하라는 권고를 받기도 했다. 이처럼 경찰은 남성중심성을 강하게 견지하는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조직문화를 대대로 이어온 정부 부처/기관이었고, 여성 구성원의 비율을 극히 소수(10퍼센트 내외)로 유지하는 등 참담한 성평등 의식 수준을 보여왔다. 그러나 시민들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공권력으로서 경찰이 맡고 있는 역할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특히 시민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것이 경찰의 주 업무임을 고려할 때, 성평등 인식이 부재하는 경찰이 우리 사회 전체에 어떤 악영향을 초래할지 상상해보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다.
그간 내부의 외부의 여러 권고에도 불구하고 성평등정책 추진에 미온적 태도를 보여왔던 경찰이 본격적인 방향 전환을 꾀한 것은 2018년이었다. 2017년 말부터 시작된 미투운동을 기점으로 성평등에 대한 시민의 관심과 요구가 높아지자 경찰청은 성평등정책 전담부서를 신설할 계획을 세우고 부서장을 내부 인력이 아닌 외부의 개방형 전문가로 채용하기 위한 공고를 냈다. 그리고 2018년을 ‘경찰 성평등 원년’으로 선포한 뒤 그해 3월 30일 드디어 성평등정책담당관실을 신설하게 된다. 젠더 거버넌스를 실행할 수 있는 부서/컨트롤타워를 통해 시민과 전문가의 목소리를 최대한 듣고 반영함으로써 시민들과 직접적인 소통을 주고받기 어려운 법 진행 부처의 한계를 보완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형식과 관행에 머무르지 않았던 성평등위원회와 성평등 기본계획
경찰청은 성평등정책담당관실을 신설한 지 2주도 채 지나지 않아 내부의 인사와 외부의 전문가가 함께 참여하는 성평등위원회를 수립했다. 특히 페미니스트 전문가인 외부의 민간위원을 다수 섭외해 젠더 거버넌스를 위한 초석을 다졌다. 성평등위원회는 운영에 있어 전문성과 내실을 기하기 위해 성주류화 분과와 여성폭력 대응 분과라는 두 개의 분과를 두었고, 각 분과의 위원장을 선임해 구체적인 정책들을 기획해나가기 시작했다.
성평등위원회의 첫 정기회의에서 내려진 가장 중대한 결정은 경찰 내부에서 이뤄질 모든 성평등정책의 근간이자 체계가 될 ‘경찰 성평등 기본계획’을 신속히 수립하자는 것이었다. 경찰 조직은 그때껏 단 한 번도 성평등 기본계획을 수립해본 적이 없었고, 따라서 내부에 초안조차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당시 성평등정책담당관실 부서장이자 성평등위원회 간사였던 이 책의 기획자/필자 이성은은 여성학자로서 성평등정책을 연구해온 전문적 이력을 바탕으로 〈2018~2019 경찰청 성평등 기본계획〉을 완성했다. 이는 경찰청뿐 아니라 모든 중앙행정기관을 통틀어 최초로 수립된 성평등 기본계획으로, 2024년 현재에도 대부분의 세부 과제들이 마무리되어 성과를 내고 있을 만큼 정교하게 짜였다.
성평등정책담당관실과 성평등위원회의 여러 페미니스트 행정가 및 전문가들은 12만이라는 거대 규모의 경찰 조직 전체에서 실현 가능한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전례 없는 노력을 기울였다. 단지 자신들의 전문 지식으로 성평등정책을 밀어붙이기보다는 시·도 경찰청 및 경찰서, 지구대, 파출소 같은 다양한 현장을 방문해 현직 경찰관들, 특히 여성 경찰관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 요구를 제대로 반영하고자 했다. 이뿐만 아니라 경찰 내부의 고위 관리자들과도 치열한 논쟁과 소통을 벌여야 했다.
2020년 8월 수립된 ‘경찰 성범죄 예방 및 근절 종합대책’은 그 주요한 성과 중 하나로, 변호사로서 성평등위원회 여성폭력 대응 분과위원장을 맡았던 필자 이경환은 경찰이 조직 내부의 성희롱·성폭력 사건을 엄중히 다루기 위해 기울였던 각고의 노력을 생생히 풀어낸다. 명시적인 규정을 마련해 피해자를 보호하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같은 관서 혹은 지휘-감독 관계로 배치되지 않도록 비공개 방식으로 조치를 취하는 방식이나, 신중한 논의 및 절차를 거쳐 징계 사례를 공개함으로써 경각심을 일깨우는 방식 등 기존의 경찰 조직에서라면 쉽지 않았을 결정이 이행된 것은 성평등위원회의 섬세한 거버넌스 덕택이었다. 무엇보다, 전국 12만 경찰의 성희롱·성폭력 사건 처리를 본청으로 일원화한 시도는 매우 중요한 분기점을 형성했다. 그로 인해 성평등 감수성과 2차피해 예방교육을 철저히 받은 숙련된 조사관들이 균질적인 조사를 실행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고, 역으로 본청 신고센터도 전국의 사건을 담당함으로써 사건 처리 경험을 집중적으로 축적해 전문성을 향상시킬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경찰 안팎을 뒤흔든 성별통합모집 이슈
그러나 젠더 거버넌스를 실행하나가기에 현실은 순탄치 않았다. 경찰 내부의 고위 관리자들은 물론, 외부 여론도 경찰청 성평등정책의 취지를 곡해하려고 했다. 특히 사태는 성평등정책의 가장 중요하고도 첨예한 이슈인 경찰 성별통합모집을 둘러싸고 심각하게 불거졌다. 성별통합모집을 실현하기 위해 성별에 따른 차등 기준을 적용하는 기존의 종목제 체력검정을 폐기하고 경찰의 직무 특성에 좀 더 적합하며 여성과 남성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순환제 동일 체력검정을 채택해야 한다는 성평등정책담당관실의 객관적 분석이 체력이 비교적 약한 중장년층 남성 경찰들을 공격하는 논리로 호도된 것이다.
당시 성평등정책담당관실의 부서장으로서 해당 사태로 인해 큰 고초를 겪은 필자 이성은은 이 책에 수록한 글에서 성별통합모집이 중장년층 남성 경찰들을 공격하며 여성 경찰을 확대하기 위한 정책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경찰 고위 관리자들은 성별통합모집으로 인해 여성 경찰이 확대되면 치안력이 약화할 것이라고 우려했지만, 이 역시 전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순환제 동일 체력검정 기준의 성별통합모집을 실시했을 때 여성 경찰 비율이 줄어든 사례(미국 워싱턴주 혹은 캐나다)도 적지 않으며, 이와 별개로도 성별통합모집은 여성과 남성 모두는 물론, 연령에 따른 차이 역시 고려하기에 알맞고, 헌법의 평등권에도 위배되지 않는 채용 방식이다. 반면 경찰 조직에서 오랫동안 행해온 기존의 성별분리모집은 어떠한 법적 근거도 없이 고위 관리자들이 성별 비율을 임의로 결정한다는 점에서 헌법의 평등권에 위배되며, 특정 성별을 사전에 배제해버리는 채용 관행이라는 점에서 점에서 매우 문제적이다.
성평등정책담당관실은 이런 부분들을 강조하며 경찰 고위 관리자들을 끊임없이 설득했고, 전체 경찰을 대상으로 하는 채용 공고인 순경 성별통합모집을 (〈2020~2023 경찰청 성평등 기본계획〉에 명기된 것처럼) 2023년에 반드시 실시해야 한다고 강조했으나, 아쉽게도 조직 내부의 여러 사정 때문에 2026년 실시로 연기되었다. 그러나 성평등정책담당관실은 경찰대학 및 간부후보생을 대상으로 한 순환제 동일 체력검정 기준의 성별통합모집이 2023년 우선 실시될 수 있도록 하는 결코 작지 않은 성과를 이뤄냈으며, 그 결과 2024년 경찰대학 여성 신입생은 50명 중 16명으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게다가 이제, 2026년 순경 성별통합모집도 얼마 남지 않았다. 성평등정책담당관실이 70여 년 경찰 역사에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이 놀라운 변화를 조직해낸 것이다.
매일의 업무를 성평등하게 바꾸기 위한 협업
한편, 경찰청은 모든 성평등정책의 골자가 되는 〈2018~2019 경찰청 성평등 기본계획〉의 근거로 삼을 만한 내부 성평등 수준에 대한 진단 기준을 필요로 하게 된다. 성인지 통계와 성평등지수를 주로 연구해온 연구자로서 당시 성평등위원회 성주류화 분과위원장을 맡고 있던 필자 주재선은 2020년 성평등정책담당관실의 요청에 따라 본격적인 ‘성인지 통계 지표 수립 연구’에 뛰어들어, 경찰청의 기존 성평등 지표를 한층 더 정교하게 다듬었다. 그렇게 ‘성평등한 경찰 조직’(조직 내 성평등 측정과 관련)과 ‘범죄 통계의 성주류화’(성평등정책 추진을 위한 통계)라는 두 가지 기본적인 차원으로 구성된 ‘경찰청 성인지 통계 지표체계’가 탄생했고, 이로 인해 경찰청은 조직 내 성평등을 구체적으로 평가하고 작성한 최초의 기관으로 자리매김했다.
여성학 연구자로서 당시 경찰청 성평등정책기획계장으로 근무했던 필자 김창연은 유용한 성평등 자가진단 도구인 성별영향평가를 경찰청에 도입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과정을 생생하게 들려준다. 성별영향평가는 정부 정책의 주요 계획, 사업, 법령을 발행 및 시행하기 전에 성인지적 시각에서 수정하거나 개선할 지점이 없는지 사전에 점검할 수 있도록 돕는 평가 체계를 뜻한다. 이를테면, ‘폭력에 대한 통념을 포함하고 있지 않은가?’라는 점검 항목을 포함해 ‘성범죄를 희화화해 묘사’하는 것 역시 이 통념에 포함된다고 명시하는 식이다. 경찰은 모든 시민에게 안전과 직결되는 정보를 전달하는 창구 역할을 맡고 있음에도, 페미니즘과 성평등, 인권의 관점에서 볼 때 매우 문제적인 홍보물을 다수 발행해 큰 지탄을 받아왔다. 불법촬영 범죄자를 희화화함으로써 해당 범죄의 심각성을 왜곡하는 홍보물이나, 여성 경찰관과 남성 경찰관의 업무와 관련해 성역할 고정관념을 드러내는 홍보물이 대표적이다.
성평등정책담당관실은 이런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 성별영향평가를 경찰 조직의 특성에 맞는 새로운 시스템으로 개조한 뒤, 홍보물 제작 실무를 담당하는 경찰관들과의 직접 소통 및 맞춤 컨설팅을 통해 성평등과 인권의 관점에서 부적절한 홍보물의 케이스를 대폭 감소시켰다. 그 과정에서 필자를 비롯한 페미니스트 전문가들은 홍보물을 무조건적으로 교정하는 방향보다는 경찰관들이 성평등 관점을 실무에 적용하는 훈련을 할 수 있도록 독려하고, 그 훈련에 가급적이면 직접 참여해 스스로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도왔다.
서울시 시민인권보호관인 필자 이해리는 글의 제목에서 드러나듯 ‘공간의 정치’라는 문제의식을 통해 경찰관서의 시설 곳곳에 숨겨진 미세한 차별을 찾아내 문제의 심각성을 공유한다. 필자가 경찰청에서 성평등정책운영계 행정관으로 일할 당시 진행했던 전국 경찰관서를 대상으로 한 여성 편의시설 실태조사의 구체적인 내용은 자못 충격적이다.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남성중심적으로 설계된 기본시설/필수시설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가장 최소한의 기본시설인 여성 화장실조차 갖추지 않은 경찰관서가 전국적으로 적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시설 문제 때문에 근무지에 배치받지 못한 경험을 한 여성 경찰들 역시 적지 않았다.
업무의 가장 근간이 되는 시설 이용에서조차 상상을 초월하는 차별을 당하고 있는 여성 경찰들의 실태를 인식한 성평등정책담당관실은 전국 시·도 경찰청 및 소속기관 여성 근무자 간담회, 전문가 합동 경찰서 현장 점검 등을 추진한 뒤 경찰 조직과 직무의 특성을 고려한 독자적인 〈경찰서 기본시설 개선 성평등 가이드라인〉을 개발했다. 또한 가이드라인 개발에 그치지 않고 경찰관서 신축·증축 설계 기준 및 관련 규정·지침 등에 성평등 관점을 반영하기 위해 전문적인 정책 연구 용역을 추진한 끝에 실질적인 변화를 이뤄냈다. 가이드라인에 따라 충남 전 지역 약 15개 경찰관서를 대상으로 기본시설 점검 및 개선을 추진한 충남경찰청, 세종남부서의 전체 기본시설을 남성과 여성 동일 면적으로 설계한 세종경찰청 등이 바로 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경찰과 시민 모두를 위한 성평등 교육
이처럼 외부의 페미니스트 전문가와 경찰은 젠더 거버넌스를 위한 토대를 마련하고 다양한 성평등정책을 실행해나는 과정에서 끊임없는 소통과 논쟁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성장시켰다. 그중에서도 현직 경찰관 혹은 예비/신임 경찰관 개개인과 호흡하며 성평등교육 현장을 이끌어나간 필자 이임혜경과 이은아의 글은 꾸준한 성평등 교육이야말로 경찰의 뿌리 깊은 조직문화를 근간에서부터 촘촘히 변혁해내는 방안임을 선명히 보여준다. 특히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시민의 성평등 의식과 실천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경찰이 반드시 성평등 관점을 구축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성평등 관점은 더 이상 선택 사항이 아니라 시민의 안전을 담보하는 것과 직결되는 필수적인 직무 역량이다.
먼저, 한국여성민우회 이사로 오랫동안 성평등교육 전문가로 이력을 쌓아온 필자 이임혜경은 성평등정책담당관실과 성평등위원회, 그리고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삼자의 협업으로 이뤄진 신임 경찰 성평등 기본교육 콘텐츠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한 경험을 풀어냈다. 필자를 비롯한 여러 연구진들과 성평등정책담당관실은 중앙경찰학교에 입교하는 신임 경찰을 대상으로 하는 성평등 교과목 교안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경찰 조직에 대한 몇 가지 유의미한 지표를 포착했는데, 그중 한 가지가 조직의 예비 구성원인 신임 경찰 시기부터 절대다수의 남성 교육생들을 중심으로 이미 성평등 교육을 보이콧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여성 교육생들조차 여성에 대한 편견과 경찰 조직 특유의 남성중심성을 내면화하고 있었다.
그러나 연구진들이 열린 토론을 적극 활용하며 다양한 사회구성원의 삶의 조건을 들여다보는 교육, 다양한 사회적 차이를 가진 타인의 위치와 경험을 상상하고 살펴보는 교육, 성평등 관점을 확립하고 그 관점에 따라 성매매나 각종 젠더폭력 등 사회현상에 대한 해석력을 높이는 교육 등을 제공하기 위해 힘쓰자, 남성 교육생들 역시 신중한 성찰의 태도를 보이며 수업에 적극 참여하는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다.
다른 한편, 이화여대 여성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경찰청 성평등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필자 이은아는 경찰 내부의 고위 관리직들을 대상으로 한 성평등 교육 콘텐츠를 개발한 연구진 중 한 명이다. 그 일환으로 2018년에는 총경(경찰서장급) 승진자를 대상으로 한 7시간짜리 성평등 교육안을 구성했으며, 이때 성평등정책담당관실 역시 경찰 관리자 대상 성평등 교육 시간을 본격적으로 배정했다. 특히 2018년의 성평등 교육안의 경우, 고위 관리직의 ‘성평등 리더십’이 21세기의 변화하고 있는 치안 환경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고, 어떤 점에서 중요한지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면서, 언뜻 성 중립적으로 보이거나 성별과 무관하게 여겨질 수 있는 치안정책에서도 성평등 관점이 필수적임을 강조하고 있다.
필자가 뒤이어 수행한 ‘21년 경찰 관리자 대상 성평등 표준교육안’은 2018년 교육안에서 충분히 다뤄지지 못한 ‘관리자가 조직 내부에서 수행해야 하는 역할’을 체계적으로 제시하고자 했다. 성차별적 언어 사용(특히 여성 경찰만 ‘여경’으로 특정해 부르는 것)을 지양하는 분위기를 선도함으로써 성평등한 조직을 만들어가는 데 초점을 두는 ‘좋은 리더를 위한 5R 성평등 리더십’ 교육안 개발이 그 한 가지 사례였다고 할 수 있다.
여성혐오에 맞서는 경찰관들을 만나다
비록 경찰이 여성 구성원을 배제하고 차별하며 오랫동안 위계적이고 남성중심적인 조직문화를 고수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이 책은 그렇다고 해서 경찰 조직 전체를 성평등 관점과 페미니즘에 무지한 폭력적인 공권력으로 낙인찍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억압적인 조직 내부에서 끊임없이 모순을 간파하고 문제를 제기하며 용기 있게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는 결단을 해온 ‘내부의 외부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
이 책의 필자 중 유일한 현직 경찰관인 정혜심(충남태안경찰서장) 역시 대표적인 ‘내부의 외부인’ 중 한 명이다. 여성 경찰인 그는 조직의 소수자로서 다수(남성)의 틈새에서 살아남기 위해 힘과 강제력을 과시하는 ‘마초 경찰’을 자처해온 지난날을 솔직하게 돌아본다. 인권침해로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당하고, 급기야 고소까지 당하는 뼈아픈 경험을 하고 난 뒤에야 스스로를 성찰하면서 현장 경찰관들에게 인권과 성평등을 가르치는 강사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 이야기를 담담히 펼쳐내는 것이다. 그는 경찰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알지 못했던 그 ‘무지’ 자체가 하나의 폭력이었음을 깨닫고는 경찰 직무 전문교육기관인 경찰인재개발원에 현직 경찰관들을 위한 성평등 전문교육 과정을 개설했으며, 그 뒤로도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과 경찰인재개발원 간 협약을 추진하며 경찰 조직 내부에서 성평등 전문 강사를 육성하는 일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경찰청 성평등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필자 추지현은 이와 유사한 경험과 맥락을 다루면서도 이 책 전체의 의의를 포괄적으로 담아낸다. 과거 경찰대학을 다닌 경험이 있는 그는 경찰대학에 입학하던 그 순간부터 마주할 수밖에 없었던 왜곡된 성평등 인식(여성 입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잠정적 우대조치)과 여성혐오를 돌이켜본다. 그러나 2018년 정부 부처 최초로 신설된 경찰청 성평등정책담당관실과 인연을 맺으면서, 경찰 조직 내부에 존재하는 날카로운 비판과 선명한 변혁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필자는 2019년 담당관실이 기획한 ‘경찰 성평등정책 중장기(2020~2024) 비전 수립 연구’의 일환으로 진행된 심층면접에서 지역, 직급, 성별, 입직 경로가 각기 다른 경찰관 50명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해당 심층면접에서 여성 경찰관들 대다수는 무엇보다 직무 배치 방식의 젠더 불평등에 높은 문제의식을 드러냈다. 다시 말해, 그들은 경찰관의 모델을 남성으로 상정하고 성폭력 피해자 보호, 여성 시위자나 여성 유치인의 신체 수색 등 성별특정적 업무를 여성 경찰관에게 할당하는 관행의 문제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기동대 여성 제대(여경 기동대)에서 근무하는 20~30대 여성 경찰들 역시 ‘내부의 외부인’으로서 조직의 모순을 누구보다 더 잘 간파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성 경찰관들은 이런 문제에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위치에 있었는데, 이는 경찰이 승진과 보직 배치에서 평판이 중요하고 극도로 남성중심적인 조직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성평등정책담당관실이 개최한 전국 여성 근무자 순회 간담회에서는 남성 경찰관들 역시 경찰의 이런 억압적 조직문화에 비판적인 의견을 표출했다.
필자의 지적처럼, 경찰은 하나의 노동조직인 동시에 그 노동의 결과가 시민의 생명과 안전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여타의 조직과 큰 차이가 있다. 성평등정책 추진이 조직 자체의 인적 구성은 물론 시민의 안전을 지키는 경찰 업무에도 큰 영향을 끼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비단 경찰만의 문제가 아니다. 남성, 비장애인, 이성애자, 시스젠더를 노동자의 기본값으로 설정하는 공무원 조직이라면, 어떻게 여성, 장애인 등 사회적 소수자의 삶을 고려하는 정책을 만들어내고 수행할 수 있겠는가? 경찰청 성평등정책담당관실은 이런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지난 5년여에 걸쳐 젠더 거버넌스를 치열하게 이뤄냈다.
그 고투의 역사를 이어받아 앞으로 어떤 다른 미래를 만들어나갈 것인지는 전적으로 시민들에게 달려 있다. “‘여경 무용론’이나 ‘여가부 폐지’ 같은 초라한 논리로 소란을 피우거나 여기에 겁먹고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젠더, 그리고 이와 맞물려 작동하는 다양한 불평등을 경험하게 되는 보통의 시민들을 위한 경찰의 모습을 만들어나가는 데 참여함으로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