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 기록평가의 새로운 지평을 열며
『국가는 어떤 기록을 남겨야 하는가? - 기록평가의 이론과 정책』
공공기록물법이 제정된지 4반세기가 지났고 20년 전부터 공공기관에 기록연구직이 배치되기 시작했으며 부족하나마 인력과 시설 등 모든 분야에서 일정 정도 양적 팽창이 진행되었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이 양질전환의 법칙에서 제시한 것처럼 일정한 양이 축적되면 질적 변화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질적 변화는 기득권이 되어 또 다른 양의 누적에 의한 질적 변화가 있기 전까지 구조적 영향을 미친다. 최근 발간된 『국가는 어떤 기록을 남겨야 하는가? - 기록평가의 이론과 정책』은 기록관리 영역에서의 질적 변화와 그 성격을 진단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많은 땀과 눈물을 흘렸고 엄청난 변화가 있었고 상당한 성과도 이루었다. 실로 상전벽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냉철한 진단이 필요한 부분도 있다. 기록물 평가가 그중 하나이다. 기록물 평가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전문가는 없을 것이다. 이 책에서 여러 번 강조하고 있듯이, 기록이 얼마 동안 보존되어야 하는지를 결정하기 위한 활동을 넘어 어떤 기록이 생산되고 획득되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활동으로 평가의 개념이 확장되었다. 외견상 평가는 기록의 생산부터 조직, 보존, 폐기 그리고 서비스까지 기록관리 전 영역을 아우르는 핵심 업무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의 현실은 다르다. 기록물 분류기준표로 대표되는 무모했지만 원대한 실험이 좌절된 이후 평가 업무는 존재가치를 잃고 있다. 국가기록 평가의 철학과 방향성을 제시하는 이론과 정책이 없고 이를 준비하는 조직과 인력도 존재하지 않는다. 법령상 평가는 보존기간 책정과 기록물 폐기 과정의 한 방법과 절차에 불과하다. 테리 쿡이 여러 차례 강조했듯이, 이론을 통해 동의할 수 있는 원칙을 설정하고 그 기반 위에서 전략과 방법론 그리고 실무가 차례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평가 업무는 거꾸로 서 있다.
이론과 정책 없이 그 형식과 매체가 날로 다양해지는 디지털기록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법령에 일부 반영된 데이터세트 관리 방안은 벌써 파열음을 내고 있다. 상당수 기록연구직은 디지털기록의 관리를 애써 외면하고 있다. 더 심각한 것은 기록과 기록관리 전문직의 유리(遊離)다. 기록의 내용과 맥락을 파악하는 게 더 어려워지고 그런 필요성도 줄어들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기록관리 전문직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요인으로 작동하지 않을까 심히 우려스럽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는 어떤 기록을 남겨야 하는가?』의 발간은 하나의 서광으로 다가온다. 무엇보다 오랜 기간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국내 연구자들에 의해 이 책이 저술되었다는 것에 큰 자부심을 느낀다. 평가 이론과 실무와 관련된 최근 동향과 쟁점, 최신 국내외 자료들이 풍부하게 제시되고 있는 것도 후속 연구와 평가 연구의 활성화로 이어질 수 있는 큰 장점이다. ‘미국 뉴욕주기록관의 기록평가’는 지방기록물관리기관의 평가 정책 수립과 실무를 위한 자극 이상의 자극이 될 것이다. ‘시민참여형 공공기록 평가’는 필자들의 지향점을 상징적으로 잘 드러내고 있다. 제4부를 이루고 있는 ‘디지털 환경에서의 기록평가’는 평가 영역을 넘어 새로운 환경 변화와 국제표준에 부합하는 기록관리로의 전환을 고민하게 하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공공기록물법에는 전문인력, 기록물관리 전문요원, 전문적 관리 등 기록관리의 전문성을 강조하는 용어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기록전문가협회도 존재한다. 우리가 전문가임을 웅변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기록관리의 중요성을 인정받고 싶은 갈망의 표현임과 동시에 전문직 윤리와 전문성을 갖춘 진정한 전문직으로 성장하겠다는 것을 스스로 다짐하는 함의가 포함되어 있다. 우리 시대와 사회의 현실이 담긴 핵심 정보원이자 역사적 증거를 어떻게 선별하고 보존할 것인가? 여기에서 우리는 어떠한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가? 당대의 비평가와 후손에게 우리의 역할과 선택을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전문직으로서 우리의 존재가치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국가는 어떤 기록을 남겨야 하는가?』의 발간이로 기록평가에 대한 논의의 활성화와 전문직으로서 우리의 존재를 재정립하는 계기가 되길 간절히 기대한다. /최재희 (전 국가기록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