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나의 세상이 온통 어둠으로 차오를 때,
멀리서부터 하나둘 불을 밝혀오는 아름답고 눈부신 기억들
창비신인소설상 수상 작가 김유나의 첫번째 소설
2020년 “화자의 갈팡질팡하는 마음 곁에 나란히 서서 그 마음을 물끄러미 응시하게 되는 독특한 힘이 있다”는 평을 받으며 창비신인소설상을 통해 등단한 작가 김유나의 첫번째 소설 『내일의 엔딩』이 출간되었다. 작가의 첫 책이자 첫 장편인 이번 소설은 창비의 젊은 경장편시리즈 소설Q의 스무번째 작품이다. 『내일의 엔딩』은 아버지의 투병과 죽음을 곁에서 홀로 지켜온 주인공 자경의 삶의 궤적을 따라간다. 간병이 길어질수록 쓸쓸한 감정에 익숙해지고 그저 무미건조한 날들만이 계속된다고 생각했던 자경은 아버지의 마지막을 지나며 언제나 자신의 곁에 있어주었던 소중한 존재들을 하나씩 발견해낸다. 지극히 평범하고 어쩌면 비참하게 보이는 삶일지라도 그 내면의 이야기를 곡진하게 풀어내어 끝내는 인물의 단순하지 않은 마음을 설득해내는 특유의 솜씨는 이번 소설에서도 빛을 발한다.
이 작품은 간결하고 힘 있는 문장으로 홀로 가족의 돌봄을 감당하는 여성의 모습을 현실감 넘치게 그리면서도 인물이 지난한 삶 속에서 빛나는 희망의 자리를 발견할 수 있도록 이끈다. 그렇게 “결말의 자리에서 바닥에 선을 긋고 다시 출발선에 서는 인물”(정용준, 추천사)을 통해 포기하지 않고 삶을 계속해나갈 때 만나게 되는 새로운 내일을 눈앞에 펼쳐 보인다. “혼자가 된 이후에 더 사랑하는 쪽으로, 덜 혼자가 되는 방식을 택하는 쪽으로”(김유담, 발문) 나아가는 이야기가 전하는 담담한 위로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끝내 우리 삶의 연약한 한 부분을 뜨겁게 끌어안을 수 있도록 이끌어줄 것이다.
목차
제1부 희망도 절망도 아닌
제2부 다시 멀리서 보면
발문|김유담
작가의 말
저자소개
출판사리뷰
우리의 엔딩이 결코 쓸쓸하지 않도록
흔들리는 마음의 곁을 따스하게 비추는 시선
소설은 주인공 자경이 아버지의 죽음을 마주한 이후의 시점에서 시작한다. 자경의 아버지는 6년 전 갑작스레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의식 없이 누워 있게 된 아버지를 홀로 돌보게 된 자경의 삶은 말 그대로 버티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늘어나는 빚과 호전되는가 싶다가도 악화되는 아버지의 상태는 자경의 외로운 삶을 더욱 삭막하게 만들었다. 누구에게도 기대지 못한 채 간신히 이어지던 날들은 어느 가을,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모두 끝난다. 대전에 마련한 빈소에서 장례를 치르는 동안, 자경은 자신을 위로하러 온 예상 밖의 사람들을 보며 마음이 조금 누그러지지만 허덕이는 것이 익숙해진 삶이 그날 하루라고 피해 가지는 않았다. 기한이 촉박한 업무들, 자신이 상중일 때 단체로 퇴사해버린 팀원들, 너무 진지한 관계가 될까 두려워 집안 사정을 전하지 못한 연인 응현이 아무것도 모른 채 쏟아내는 원망까지…… 그중에서도 가장 골치 아픈 일은 아버지와 함께 살던 고향집이 갑자기 팔려 당장 이틀 안에 짐을 빼줘야 하는 현실이다. 지금이 아니면 집을 팔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자경은 장례가 끝나기 무섭게 무거운 마음을 안고 고향집으로 향한다.
김장비닐 가득 담아 몇번이나 짐을 비우고 중고 가구점에 헐값으로 가구들을 넘기기를 반복하던 저녁, 자경은 서재 한구석에서 아버지의 일기장을 발견한다. 일기장에는 영화감독을 꿈꾸며 영화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자경의 이십대를 멀찍이서 지켜보던 아버지가 남긴 기록들이 있었다. 자경은 아버지의 오래된 DVD장에 꽂혀 있는 자신의 마지막 영화 「소설小雪」을 찾아 재생하고 오래전 한겨울 무주에서 영화를 촬영하던 어느 날들을 떠올린다. 자경은 자신이 만든 영화가 아버지가 남긴 일기의 내용처럼 “인간을 기어이 살아가게 하는 삶의 소중한 빛” 같은 가치를 담은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삶에서 그런 것을 발견해보려 시도했던 적도 없었다. 그러나 약 이십년 만에 다시 재생해본 영화 앞에서 자경은 무주에서 보았던 오묘하고 아름다운 장면을 기억해낸다.
“다시 멀리서 보면,
모두 거기에 있는 것들”
자경의 영화에서 주인공이 끝내 찾지 못했던 희망의 불빛은 모든 것을 잃었다 생각한 현실에서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자경은 언제나 멀리서 희미하게 반짝이며 자신을 지켜주었던 “다시 멀리서 보면, 모두 거기에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세간 살림이 다 나가고 내일이면 다른 이의 소유가 되는 고향집에 누워 자경은 자신을 지탱해주었던 소중한 존재들을 하나하나 마음에 담아본다. 그렇게 어두웠던 오늘을 무사히 지나 빛나는 내일을 향해 나아간다.
김유나의 소설 속 인물들은 대체로 과장하지 않고 담담하고 차분한 태도로 자신의 앞에 놓인 하루를 감당한다. 6년이라는 시간 동안 홀로 아버지를 간병하면서도 그게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라는 듯 묵묵히 한해 한해를 지나온 자경, 안정적인 직업 없이 매일을 견디면서도 확답을 주지 않는 연인의 곁을 변함없이 지키는 응현의 모습은 씩씩한 것을 넘어 어딘가 서늘하고 무감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현실에 치여 많은 감각이 무뎌지고 단단해질 만큼 단단해졌다고 느끼는 날들 속에서도 문득 마음이 흔들리는 방향을 따라가게 되는 날이 오기 마련이다. “잊고 있던 이상한 순간”이 떠오를 때 애써 외면하고 싶지 않다고 느끼는 날이. 자경은 고향집에서 새벽을 맞이하며 어떤 기억 속을 걷게 된다.
너무 꼭 쥐어 시들어버린 꽃 같은 순간들. 불을 환히 밝힌 할머니 집과 먼지처럼 작아지던 도깨비불, 툇마루에 앉아 마늘을 빻으며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아빠, 잎, 눈, 구름 한조각, 계절을 입은 채 언제나 그 자리에 있던 감나무 아래를. 다시 멀리서 보면, 모두 거기에 있는 것들.(136~37면)
언제나 외로이 혼자 감당해왔다고 생각했던 시간을 함께해주었던 소중한 존재들을 떠올리며 자경은 상실의 끝에서 새로운 시작을 만난다.
우리는 때로 오늘과는 다른 내일의 엔딩을 꿈꾼다. 나아지지 않을 것 같은 현실, 원치 않는 방향으로 요동치는 감정들, ‘희망’이나 ‘사랑’ 같은 이름을 시원하게 붙여주고 싶지만 “산다는 건 희망도 절망도 아니다”라고 적게 만들거나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진심을 마주할 용기를 빼앗는 무력감의 한복판에서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었으면 하는 심정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고통 속에서 새로운 곳을 향해 나아가게 만드는 힘은 소리 없이 곁을 지켜주었던 소중한 존재들로부터 온다. 이 책은 우리가 두고 온 많은 것을 다시 멀리서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선물해줄 것이다. 그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사랑의 기억이 “용기를 내는 엔딩의 방향으로 자경을 밀어줄 수 있었던”(작가의 말) 것처럼 오늘을 힘차게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따뜻한 내일의 엔딩을 향해 나아가도록 이끌어주는 순간들이 찾아오기를 바란다.
작가의 말
빛이 완전히 차단된 터널 속을 걸을 때면 여름도 한낮도 다른 세상처럼 지워졌다. 소리의 울림과 공기의 흐름, 냄새마저도 달랐다. 터널이니 당연한 걸까? 어쨌거나 그 터널을 통과하며 나는 다른 차원에 존재하고 있을, 이제는 곁에 없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터널을 지나는 순간만큼은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를 향해 직선으로 흐르는 것이 아님을 느꼈고, 어느 순간엔 정말로 그렇게 믿게 되었다. 그 터널을 걷던 시간이 있었기에 마음 편히 용기를 내는 엔딩의 방향으로 자경을 밀어줄 수 있었다. 소설 속 인물들과 함께 걷던 여름의 터널을 이제 막 빠져나온 기분이다.
2024년 가을
김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