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고도 자본주의 사회 ‘아메리카’에서 소외된
‘실종자’를 통해 그려낸 현대 사회에 대한 슬픈 통찰
‘카프카적’ 상상력의 정수!
★ 《실종자》는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다. -프란츠 카프카
문예세계문학선 리뉴얼 시리즈 첫 신간이자 문예세계문학선 131번으로 프란츠 카프카의 대표작 《실종자》가 출간되었다. 《실종자》는 《소송》, 《성》과 더불어 이른바 ‘카프카 3대 장편소설’ 혹은 ‘카프카 고독 3부작’으로 꼽히는 작품으로, 짧은 생, 죽음의 문턱에서도 창작에 대한 열정이 식을 줄 몰랐던 카프카 문학의 정수가 담겨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실종자》는 독일어 전문 통번역가 송경은이 원문을 면밀히 분석해 문체와 정서를 고스란히 담아내면서도 가독성을 고려하고 자연스러운 우리말의 말맛을 살려 섬세하게 옮겼다. 또한 연세대학교 독어독문과 홍길표 교수의 카프카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현대 독자의 감수성을 고려한 시의적 해석이 담긴 충실한 해설을 수록했다.
《실종자》는 부모에게 쫓겨난 열일곱 살 청년 카를 로스만이 낯선 미국에서 꿈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다. 안타깝게도 그의 희망은 번번이 배반당하고 삶은 계속해서 그를 깊은 절망과 소외로 몰아넣는다. 카프카가 약혼녀 펠리체 바우어에게 보낸 편지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라고 소개한 이 소설은 미완이지만 풍성한 이야기 속에 다양한 상징과 의미가 숨어 있고, 독자를 상상의 세계로 이끄는 신비한 매력이 있는 작품이다. ‘카프카적’ 상상력이 빛을 발하며 현대 독자에게도 재미는 물론 깊은 통찰과 영감을 주는 고전이다.
목차
Ⅰ. 화부
Ⅱ. 외삼촌
Ⅲ. 뉴욕 근교 별장
Ⅳ. 걸어서 람세스로
Ⅴ. 옥시덴털 호텔에서
Ⅵ. 로빈슨 사건
자동차가 멈춘 곳은……
“일어나! 일어나라고!”……
미완성 장들
(1) 브루넬다의 출발
(2) 카를은 길모퉁이에서……
기차는 이틀 밤낮으로……
작품 해설
프란츠 카프카 연보
저자소개
출판사리뷰
거듭 맞닥뜨리는 부조리와 좌절,
끊임없이 희망을 배반당하며
사라져가는 존재와 ‘아메리칸드림’
소설은 주인공 열일곱 살 청년 카를 로스만이 자유의 여신상이 서 있는 뉴욕 항구에 도착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카를은 하녀의 계략으로 하녀에게 거의 겁탈당하다시피 하고, 그녀가 임신하자 그의 부모는 그를 미국으로 쫓아버린다. 낯선 미국 땅에 홀로 떨어진 로스만은 자기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선한 의지와 미래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 있다. 특히 이 소설의 첫 번째 장인 〈화부〉는 자신이 처한 상황과 새로 마주한 세계를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읽고 이성적인 판단을 하려 노력하며 자기를 주장하고 정당화하고자 하는 주인공 로스만의 캐릭터를 잘 보여준다. 더군다나 로스만은 배에서 내리기도 전에 미국에서 사업에 대성하고 상원의원이 된 외삼촌까지 만난다. 여기까지는 마치 ‘성장 서사’의 전형적인 주인공처럼 보이는 로스만이 독일에서 강제로 중단됐던 자신의 ‘성장 이야기’를 ‘아메리칸드림’의 실현으로 다시 이어갈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카프카의 세계에서 좀처럼 만나기 힘든 행복한 우연은 여기까지다.
그의 외삼촌은 카프카도 밝히듯이 아무런 죄가 없는, 무해한 로스만을 곧 집에서 쫓아내고, 로스만은 다시 자신의 ‘이야기’가 중단됐던 지점으로 던져진다. 로스만이 엘리베이터 보이로 일하게 된 옥시덴털 호텔에서 겪은 이야기도 그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지 않는다. 세계는 그에게 결코 삶의, ‘자기 이야기(history)’의 주인이, 주체가 될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가 아무리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자기 앞의 상황을, 세계를 파악하고 제어하려 해도 우연은 항상 그의 편이 아니다. 그의 삶은 그 자신이 아니라 불가항력의 우연이 지배한다. 로스만이 미국에서 경험한 삶은 하나의 연속적인 성장 서사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불연속적이고 단편적인 에피소드들로 흩어질 뿐이다. 옥시덴털 호텔에서 도망쳐 나와 그가 들어가게 되는 곳은 여가수 브루넬다의 집인데, 브루넬다 에피소드는 끝을 맺지 못하고 중단된다. 로스만을 가두고 하인으로 만든 브루넬다 역시 히스테리와 변덕, 폭력의 아이콘으로 세상에서 고립된 로스만이 그 어둠의 세계에서 탈출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가 설령 브루넬다의 집에서 탈출한다 해도 그의 앞에 펼쳐질 여행길이 심연으로 이어지리라는 것은 소설의 제목이 이미 말해준다. 주인공이 길을 잃거나 어둠 속에서 방향을 상실하는 장면은 《실종자》, 《소송》, 《성》 세 소설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목표는 있다, 그곳에 이르는 길이 없을 뿐이다. 우리가 길이라고 부르는 것은 지연이다”라는 카프카의 아포리즘은 그의 장편소설 속 모든 주인공에게 해당한다.
파기되었다가 다시 쓰이고
작가 사후 불태워질 뻔한 원고
미완의, 그러나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
카프카는 일찍이 대학 시절부터 문학 창작에 대한 꿈을 품었지만 가족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법학을 전공하고 박사학위까지 취득해 법률가가 되었다. 그리고 준공무원에 해당하는 보험공사 직원으로 성실히 복무하며 평생을 법률가로 살았다. 《실종자》는 문학 창작을 포기할 수 없었던 카프카가 낮에는 직장에서 근무하고 밤에는 글쓰기에 몰두하던 시절 집필한 첫 장편소설이다. 무엇 때문인지 집필을 시작한 이듬해 원고를 파기하고 다시 썼고, 소설의 첫 장인 〈화부〉는 단편으로 출간되어 카프카에게 폰타네문학상을 안겨주기도 했으나 결국 이 작품은 미완으로 남았다.
카프카는 생의 마지막 순간 평생의 벗 막스 브로트에게 자신의 유고를 모두 불태워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브로트는 카프카의 뜻을 따르지 않고, 많은 작품과 일기, 편지 등을 편집, 출판해 카프카의 삶과 문학 세계를 세상에 널리 알렸다. 1924년 카프카가 세상을 떠나고 《실종자》는 《소송》과 《성》에 이어 1927년 《아메리카(Amerika)》로 출간되었는데 ‘아메리카’는 출간 당시 브로트가 임의로 붙인 제목이었다. 1914년 12월 31일자 카프카의 일기에서 카프카가 이 작품을 ‘실종자(Der Verschollene)’로 지칭한 기록이 있었으나 한동안 브로트가 붙인 ‘아메리카’로 통용되다가 1983년 카프카의 육필 원고와 비평본이 독일 피셔(S. Fischer)사에서 《실종자》로 출간되었다. 문예세계문학선 리뉴얼 시리즈로 선보이는 첫 신간 《131 실종자》는 카프카 작품을 원전으로 출간해온 피셔사의 오리지널판을 저본으로 삼았다.
카프카는 브루넬다 에피소드를 완성하지 못하고 소설을 중단했다. 그가 이 작품을 집필할 당시 그의 약혼녀 펠리체 바우어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소설을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라고 소개했다. 《실종자》는 비록 미완의 작품이지만 풍성한 이야기 안에 다양한 상징과 의미가 숨어 있고 마치 완결된 듯한, 그 자체로 완전한 느낌을 준다. 또 신화와 고전의 알레고리, 원형적 심상을 환기하는가 하면 현대 독자에게도 시의적 공감과 영감을 불러일으키며 독자를 무한한 상상의 세계로 이끄는 신비한 매력을 지닌 작품이다.
고도 자본주의 사회 ‘아메리카’에서 소외된
‘실종자’를 통해 그려낸 현대 사회에 대한 슬픈 통찰
카프카는 부모에게 쫓겨난 열일곱 살의 주인공 카를 로스만이 살아갈 세계를 미국으로 설정해 자본주의와 기술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사회에서 ‘성장’과 ‘소속감’의 의미를 성찰하게 한다. 로스만이 체험하는 미국은 그가 살던 유럽이 장차 도달할 미래다. 아메리칸드림을 이룬 외삼촌의 세계와 옥시덴털 호텔에서 로스만이 경험하는 밑바닥 삶을 통해 그려지는 보다 현실적인 미국의 생활 세계는 극명한 대비를 이루며 사회의 부조리와 개인의 문제를 여실히 드러낸다.
연세대학교 독어독문학과 홍길표 교수는 이 책의 작품 해설에서 카프카가 쓰는 ‘성장 서사’의 불가능성이 근대 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의미한다고 짚어낸다. 18세기 근대 사회와 ‘개인’의 출현 이후 ‘성장과 발전’은 매우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근대 사회와 개인은 성장과 발전이라는 강박적 목표 아래 살아가며 그 누구도 그 큰 압박에서 자유롭지 않다. 시간의 문제가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로스만의 외삼촌은 회사에서 직원들이 서로 인사하는 관례를 없앴는데 그 또한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다. 외삼촌은 로스만에게 새벽 4시 반부터 일어나 자기 계발에 매진하라고 요구한다. 카프카 장편소설의 주인공들은 모두 하나같이 피곤한 몸, 졸음과 싸워야 한다. 근대 세계의 성장과 발전은, 도래할 미래는 흘러가는 시간을 전제로 작동한다. 소설의 후반부에서 브루넬다의 이웃으로 등장하는 대학생 조셉 멘델은 로스만에게 자신은 아예 잠을 전혀 자지 않고 대신 하루 종일 블랙커피를 마시며 살아간다고 말한다. 로스만을 비롯해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노동자는 대부분 일분일초를 아끼기 위해 발버둥 치며 살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성장과 발전, 자아실현의 역사를 쓰고 있다기보다는 사실상 ‘자기 착취’의 삶을 살아간다.
호텔 옥시덴털의 세계가 그려지는 다섯 번째 장에는 로스만을 위시해 수십 명의 엘리베이터 보이에게 제공되는 공동 숙소 이야기가 나온다. 하루 열두 시간의 고강도 노동에 지친 소년들을 수용하는 이 공동 숙소는 거대한 ‘노동수용소’를 가리키는, 《실종자》 속 혹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근대 세계에 대한 은유로 읽혀도 무방하다.
근대 사회는 ‘멈춰 있음’을 그리고 ‘반복’을 용납하지 않는다. 개인에게 요구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은 쉼 없이 움직이고 새롭게 변하고 발전해야 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역사가 200년 동안 달려온 지금, 인류가 서 있는 곳은, 우리보다 앞서 쉼 없이 달려간 카프카 소설 속 주인공들이 도착한 종착지는 어디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