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중심’이라는 비존재적 공간과 분투하는 주체
윤숙 시인의 신작 시집 『꽃잎, 흔들리는 중심』에서는 본질적으로 부재하는 중심이라는 공간을 탐색하고 그 존재 가치를 사유하는 주체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중심이라는 공간은 가변성을 지닌다. 경계의 매듭을 짓는 주체가 누구인지에 따라 또 어떤 기준에 의해 만드는지에 따라 매듭의 형태와 위치가 달라지므로 중심은 언제든지 유동한다. 그러나 이번 시집에서 윤숙 시인이 구축하고자 하는 중심은 표류하는 마음을 한데 모으기 위한 사유와 인내의 공간이다. 그 공간에서 시인은 주체와 세계를 조망하고 연쇄적으로 고개 드는 번민과의 분투를 시도한다. 그리고 그가 보여주는 시의 언어이자 삶의 언어들은 이러한 미덕의 전개 과정에서 진정한 가치를 확보한다.
이번 시집에서 윤숙 시인의 시적 상상력은 역사 인식과 지구적 문제, 생의 덧없음과 무욕無慾의 의지, 인간으로서 외면할 수 없는 존재 방식에 대한 탐구와 내면 가다듬기 등 다양한 방면에서 촉발된다. 이런 감수성은 주체의 존재성에 관한 자의식이 시인의 세계관에 넓게 자리함을 함축한다. 떠나가지 않아서 사라지지 않은 시간을 온몸으로 떠안으며 시인이 고민한 흔적과 아포리아aporia가 이번 신작 시집에 담긴 것이다.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 붉은 잎 하나 저도 모르게
동행
흐르는 것에 대하여
단풍잎 하나
분꽃
일어서는 바람
너도 된장
겨울숲
멀미
분갈이
걱정인형
오빠 생각
산행
부활의 길
옥수수차 끓이기
제2부 | 저녁이 오고 새벽이 온다
찔레꽃 질 때
새싹
미술관의 앵무새
꽃잎, 흔들리는 중심
뚝배기
순창 가는 길
넝쿨장미
꽃잎 날다
고리
노을, 물들다
봄이 오는 길목
호명산을 오른다
전동차는 돌아오지 않는다
늦가을 철학자
제3부 | 마음은 이미 뜨거워지고
빈 소주병에 대하여
산수유꽃
고창 청보리밭에서
달맞이꽃 질 때
보리굴비
아날로그가 그리운 날
아버지의 지게
눈 내리는 밤
어머니의 순대국밥
꽃대궁으로 서기까지
불통에 대하여
줄다리기
한여름 밤에
쏨뱅이
제4부 | 길은 또 다른 길이 된다
산나리꽃
길 위에서
몽산포 몽돌
생선가시에 찔리다
북극고래
어떤 생존
철쭉꽃 진다
가야산이 말을 하다
해질 무렵 강둑에 앉아
가을 플라타너스
깔딱고개를 넘으며
참치 캔
두 마음
길을 열다
제5부 | 초록감은 바람 속을 견디며 산다
제비꽃 피다
내소사 풍경소리
누에고치의 꿈
얼룩진 시간
달팽이집
담쟁이
숨은 날개를 찾아서
봄날
배꽃을 찾아
동백꽃
민들레 꽃씨
단감이 되기까지
덕수궁 회화나무
벚꽃잎이 날린다
해설_김태경/‘중심’이라는 비존재적 공간과 분투하는 주체/-윤숙론
저자소개
출판사리뷰
윤숙 시인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곳은 주체의 존재 방식에 대한 탐구이고 내면세계이다. 그리고 그가 걷는 길은 쓸쓸하지만 온기가 있다. 미하일 바흐친Mikhail Bakhtin이 “나의 자의식과 자기발화가 그 안에서 그 자체를 실현할 수 있고, 삶이 시작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가치적인 대기大氣에 어느 정도의 따스함이 필요하다”라고 언급했듯이(『말의 미학』, 길, 2007, 201쪽) 윤숙 시인이 주체를 ‘중심’에 두는 행위는 자기 자신에 대해 겸허하게 접근하는 방식이고 그 마음에서 나오는 언어는 따스하다. “먼지 쌓이듯 늘어가는 내 허물들/ 옷을 입은 들 가려질까”(「겨울숲」) 싶지만, “바람 속 흔들리며/ 경계의 벽을 넘어서”(「내소사 풍경소리」) 그가 가는 길에는 꽃향기가 난다.
이 길일까 저 길일까
꽃길
손을 뻗어 움켜쥐려 해도
잡히지 않는 무지개길
그 유혹에 빠져
무더기 꽃타래 속으로 들어선다
시간 속 꽃타래
인내하며 풀어나가는
삶의 여정이
나를 다스리는 길일 것이다
언제나 중심은 외롭고
흔들리는 법
만 갈래 이름 끝을 쥐고
달무리 따라 걸어가면
꽃술에 지고 피는
그 작은 우주 속
한 생애의 중심이 잠깐 흔들린다
-「꽃잎, 흔들리는 중심」 전문
‘중심’이 흔들릴 때조차도 주체를 둘러싼 ‘가치적인 대기’에 따스함이 느껴지고 꽃향기가 난다. 그것은 주체가 “이 길일까 저 길일까” 갈등하고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시간 속 꽃타래”와 같은 삶의 여정을 “인내하며 풀어나가”기 때문이다. 3연 말미에서도 드러나듯이, 이러한 과정은 “나를 다스리는 길” 위에서 벌어진다. 그가 느끼는 상념을 시인은 꽃이라는 이미지에 기대어 표현한다. 위 시에서 엿볼 수 있듯이 주체와 꽃이 겹쳐진 이미지는 시적 전언의 순도를 높여주는 효과를 낳는다. 강조하건대, 낙화라는 미적 흔적을 강조하면서도, 주체의 속내를 읽게 되는 독법은 윤숙 시의 돌올한 기투企投라 할 것이다.
주지하듯 꽃의 중심에서 꽃잎이 피거나 질 때, 꽃술은 그 무게에 잠깐 흔들린다. “그 작은 우주 속”에서 “한 생애의 중심이 잠깐 흔들”리는 것이다. 이처럼 이상과 정서가 흔들릴 때 시인은 시와 함께 ‘중심’을 잡고자 노력했겠다. 그런 분투하는 주체의 의지가 표제작인 인용시를 포함하여 이번 시집에서 “생살 뚫고 오르는 붉은 뚝심”(「찔레꽃 질 때」)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하나의 꽃나무로 우뚝 서는 아픔 속에 피는 꿈”(「배꽃을 찾아」)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 윤숙 시인에게 시란 “끝없는 흔들림 속에/ 자신의 세계를 세워가고 있는/ 또 하나의 길”(「가을 플라타너스」)이다. 그가 비존재적 공간인 ‘중심’에 다양한 대상을 위치시키며 존재성을 파악하고자 하는 시도도 종래는 자신을 향해가고 있다. 이러한 창작 지향과 작업 방식은 “하늘 자궁 속/ 별꽃으로 피어나 산정에 앉는 일”(「옥수수차 끓이기」)과 같다. 그의 시편 하나하나가 “별빛 길 열어가는/ 마음 한 조각”(「넝쿨장미」)인 것이다. 윤숙 시인은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물과 세계를 호명하며 대상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가 ‘중심’에 대상을 존재하고자 하는 의식 저편에 그것을 각별하게 생각하며 조명하려는 따스한 마음이 생성되고 있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윤숙 시인의 시 세계는 끊임없이 “말이 말을 이어가는 어둠의 터널길 열며”(「몽산포 몽돌」) 가고, 그렇게 “저기/ 길이/ 길을 열며”(「해질 무렵 강둑에 앉아」) 갈 것이다.
[시인의 말]
골목길 밝히는 외등처럼
한자리 올곧게 선
버팀목
다독이기도
끌어주기도
때론
말씀이 되어
나를 치유하는
수많은 삶의 언어들
이제
흐르는 강물 위로
이야기 꽃잎 띄워 보낸다.
2024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