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대학교 강단에서 평생 연구와 강의를 해온 작가가 첫 번째 시집을 출간했다. 작가는 시를 읽고 쓰는 일이 삶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문학과 역사 그리고 철학을 배우지 않고 올바르게 인생을 살아갈 수 없듯이 세상과 소통하고 공감하면서 살아가고자 한다면 시가 없으면 안된다고 말한다. 또한 시인의 삶은 인간의 순수한 영혼을 언어로 건축하는 예술가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시집에는 1987년부터 전국의 여러 대학에서 글쓰기를 지도하면서 쓴 시, 『상아탑의 여운』(1996)이라는 한국시조학회 회원들의 사화집에 실린 시조, 저널과 잡지사에 청탁을 받은 시, 2012년부터는 서울에서 활동하는 고향 문인들과 동인지를 발간하면서 발표한 시, 새로이 새벽에 일어나 쓴 시들이 실려있다.
목차
서문
Ⅰ부 삶의 뿌리
버팀목과 은행나무
감자 캐는 날
아버지의 과수원
서리가 내리면
청계산 이수봉
남태령 고갯길
함벽루의 대나무
인왕산 자락길
무학대사
느티나무
고향의 광복절
홀로 서기
황매산의 억새
인왕산 둘레길에서
들새미 느티나무
가야산 가는 길
Ⅱ부 도시의 풍경
사당역, 파스텔시티
뫼비우스의 띠
디지털의 빛, 삼성전시관
아파트의 유리창
시골나무와 서울나무
어느 인문학자의 고백록
오두산 정상의 촛불
은행나무의 그늘
가을철 압구정의 달마대사
출근길 동화
아버지의 우수(雨水)
지구촌 경제민주화
오도산의 촛불
대중매체의 사회학
서울성곽
Ⅲ부 고향의 언덕
조약돌
냇물
물길
정다운 고향
고향가는 길
풀뿌리 사랑
산 아래 마을, 흘러간 시간
시골로 돌아온 첫날
명상의 고향
소낙비 단상
해 돋는 아침의 만남
산제동천
싸락눈과 두메산골
산그림자
운동장의 오징어 게임
고향가는 참새들
마을로 가는 들길
고향의 낭만
산봉우리
걸음을 멈추고
Ⅳ부 마음의 향기
첫사랑
벌레와 나뭇잎
인생의 비탈길
여름철 지내기
비름나물
여행길
감나무골 대추나무
가식의 수사학
오뚝이처럼
삶이란
처세술
상처
세월의 나이테
생명의 찬가
자전거
깃발과 대문
세상과 호흡하기
강
난초
* 시인의 문화 비평: 한글문학과 대중문화의 소통하기
* 해설: 생의 고갯길에서 부른 고향의 노래
저자소개
출판사리뷰
이 시집은 고향에 대한 정회, 그가 살고 있는 도시의 풍경 묘사,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 등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대상에 대한 관찰과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이 돋보이는 이 시집의 많은 부분은 그의 고향 합천을 제재로 하고 있다. 시인의 기억 속에 재생되는 합천은 그의 삶의 뿌리이자 현재적 삶의 원천이 된다. 독일의 낭만주의 시인이자 철학자인 노발리스(Novalis)는 철학이란 본래 고향을 향한 향수이자 어디서나 자기 집에 머물고자 하는 충동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 시집의 내용 또한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바로 떠나온 고향 합천에 대한 향수이자 그곳으로 향하고자 하는 충동이자 실천이라 할 수 있다. 시집 곳곳에서 고향의 풍경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호명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황강의 강물은
함벽루에서 떨어지는
처마의 물을 받아 흐르고
신라의 대야성은 말없이
그 흔적만 남았는데
활을 쏘는 궁터에는
천년도 더 지난 그 시절의 정신이
낙동강의 줄기가 된다.
바위 위에 자라난
대나무는
항상 푸르름을 머금고
죽죽으로부터 이어진 기개를
화살처럼 쏘아댄다
무수한 산을 얼싸안고 지나온
황강물의 이야기를
오늘도 나는 고개 끄덕이며 듣고 있다.
- 「함벽루의 대나무」 전문
합천은 그의 아버지, 어머니가 살던 곳이며,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장소이다. 또한 신라와 백제 간의 대야성 싸움에서 신라 화랑 죽죽(竹竹)이 전사한 곳이며, 대몽항쟁 당시 팔만대장경을 만든 해인사가 있는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황강의 언저리에 있는 함벽루(涵碧樓)는 합천 사람들에게는 자랑거리이다. 함벽루는 고려 충숙왕 8년(1321년) 합천읍을 가로지르는 황강 가에 세워진 누각이다. 대대로 시인 묵객들이 이곳에서 풍류를 즐겼으며, 그것을 말해 주듯 지금 이곳에는 퇴계 이황, 남명 조식, 우암 송시열 같은 쟁쟁한 제현(諸賢)들의 편액이 걸려 있다. 누각 뒤편의 큰 바위에 새겨진 송시열의 함벽루라는 글씨가 더욱 이곳의 멋을 더하고 있다. 함벽루에서 떨어지는 처마의 물을 받아 유유히 흐르는 황강은 합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시인에게 깊이 각인된 고향의 표상이다. 시인의 분신과 다를 바 없는 화자는 함벽루의 대나무와 그 앞을 흐르는 황강의 강물을 보면서 신라 화랑 죽죽으로부터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푸른 역사를 떠올린다. 이러한 합천의 장소성은 이 시집 곳곳에서 합천의 산과 마을로 이어진다.
산과 산이 이어진 마을이라고
오두산과 두무산을 이어주는 즈음에 터를 잡아
등산객들이나 알 수 있는 이름
오두산 정상에는 위성기지 첨탑이 설치되고
산 정상의 샘물이 나오는 동굴은
옛날에 산신령인
거인이 살았다는데
전파를 중계하는 시설로 사라져
흔적을 찾아도 없네
- 「산 아래의 마을, 흘러간 시간」 중에서
오두산과 두무산 사이, 산 아래 자리 잡은 산제마을이 그의 고향이다. 한때는 많은 사람이 살았던, 그러나 지금은 등산객이나 겨우 알아보는 잊혀진 마을이다. 도선국사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오도산 정상에 위성기지 첨탑이 세워지면서, 전설 속의 인물인 거인이 살았다는 동굴도 마을에 살았던 많은 사람들도 사라져 버린 고향은 무심한 시간만 흐르는 곳이다. 문명의 이기(利器)에 의해 전설도 인정도 사라져버린 고향은 화자에게 허전함과 아쉬움만 남는 부재의 공간이다. 야영이나 사진 촬영을 위해 외지인만 드나드는 고향이지만 그래도 이곳은 도회에 나온 화자에게 늘 돌아가고 싶은 장소임에 틀림없다.
봄비가 오는가 고향에는
꽃샘추위라 싸락눈이 내리는가
험한 고갯길을 굽이굽이 돌아간
두메산골의 국도 위에는
느릿느릿 아침을 밝혀주는
시내버스 기사가
멀리서 오는 손님의 모습을 기다리면서
이 고개를 돌고 저 고개를 지나
작은 들판 사이에
너를 찾다가 버리고 떠나온
이 골짝 저 골짝에도
봄비가 오락가락하며
싸락눈이 내리는가
- 「싸락눈과 두메산골」 중에서
이용악의 「그리움」을 패러디한 이 시는 도시에 살아가고 있는 화자가 불현듯 느낀 고향 충동을 그려 보이고 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굽이굽이”, “느릿느릿”, “오락가락” 같은 첩어의 사용이나 “싸락눈이 내리는가”, “이 골짝 저 골짝에도”와 같은 시구의 적절한 반복을 통해 더욱 심화되고 있다. 회상의 영역에 자리잡은 고향은 도회의 삶에 지친 화자에게는 늘 돌아가고 싶은 원형적 공간이다. 도회에서의 신산(辛酸)한 삶과 고향마을의 풍경은 서로 대척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도시 한 복판에서도 화자의 마음은 늘 고향으로 향한다. 「고향가는 참새들」에서는 “보리이삭, 옥수수수염, 한여름의 들판/ 하지에 캐는 감자,/ 밭 가에 뒹구는 애호박과 오이넝쿨이/ 함께 앉아서 천 리 길을 달려간다.”
서울이란 도시는 그가 살아가는 주된 삶의 공간이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사당역, 예술의 전당, 삼성전자 전시관, 쌍둥이 빌딩, 아파트의 유리창, 인왕산, 광화문 광장, 롯데월드타워, 압구정, 반포대교, 올림픽 공원 등은 그의 서울살이를 구성하는 주 대상들이다. 그 속에서 그는 “넘어지고 흔들거려도 다시 일어나는/ 오뚝이처럼”(「오뚝이처럼」) 살아간다. 합천 시골 출신인 시인은 흔들릴 때마다 고향의 풍경을 떠올리거나 끊임없이 서울 주변의 산을 오르내린다. 「인왕산 자락길」과 「인왕산 둘레길」, 「청계산 이수봉」, 「남태령 고갯길」, 「서울 성곽」 등을 걷는다. 고향이든 서울이든 그는 늘상 길 위에 있다. 길 위에서 마주치는 풍경은 그의 삶의 주된 나침판이 된다.
서울의 야경과 높은 빌딩에 마음을 둘 수는 없습니다
아부지요
저는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 느티나무를 가꾸겠습니다.
화려한 서울 강남의 빌딩을 가지지 못하여
당신이 평생토록 못난 자식이라고 해도
다시는 서울 강남의 높은 빌딩에 마음을 두지 않겠습니다
아부지요
아들은 이제 시골에서 선산을 바라보며 은행나무를 찾겠습니다.
- 「지구촌 경제민주화」 중에서
이 시는 그가 거주하는 서울이 안주할 진정한 장소가 되지 못함을 보여준다. 그는 서울에서의 삶의 힘겨움에 대해 “살아가는 이 길에서/ 나는 비탈길을 걸어가는 노루처럼/ 외롭고 힘들다고 말할 뻔 했다”(「인생의 비탈길」)라고 고백한다. 돈과 욕망이 난무하는 서울에서의 삶이 그가 지향하는 삶이 아니라는 것은 중요하다. 화폐로 대표되는 교환가치보다 훼손되지 않는 사용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겠다는 것이 화자의 생각이다. 그래서 이 시의 화자는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의 산과 들, 그 속에서 자라는 나무처럼 살아가고자 다짐한다. 실제 작가인 류교수가 몸은 서울에 있었으나 마음은 늘 고향 합천에 살고 있었음을 이 작품은 보여주고 있다.
합천호 운무의 모습을
이른 아침에 다시 보려면
가파른 산길의 등정을 몇 번이나 해야 한다.
밤낮으로 기온 차가 심해져
두무산이나 장군봉의 차가운 기운이
오도산으로 찾아가서 눈맞추며
안개구름이 되어 피어올라야
해 돋는 아침의 운무가 장관을 이룬다
- 「해 돋는 아침의 만남」 중에서
- 박용찬(문학평론가, 경북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