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언어 다양성은 어떻게
불평등을 고착시키고 차별을 정당화하는가
언어 다양성은 인간 사회의 보편적 특성이지만, 언어 다양성이 중립적으로 작용하는 경우는 드물다. 실제 세계에서 언어 다양성은 언제나 언어의 계층화와 언어적 종속을 수반한다. 이 책은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고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의 이주가 일상화된 시대에 자유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발생하는 언어 불평등을 생생한 사례를 바탕으로 적나라하게 분석한다. 언어 다양성이라는 차원이 추가될 때, 경제적 불평등, 문화적 질곡, 정치적 참여의 불균형과 같은 우리 사회의 부정적 측면이 어떻게 더 왜곡될까? 이 책은 고용, 교육, 커뮤니티 참여와 같은 사회 정의에 중요한 영역에서 언어 다양성과 불평등의 관계를 깊이 있게 성찰한다.
목차
1장 서론
언어 다양성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 사회 정의 | 책의 개괄 | 대화에 참여하기
2장 계층화된 언어 다양성
언어, 다중언어주의, 언어 다양성 | 다양성에서의 위계 | 언어 피라미드 | ‘다양한’ 사람은 누구인가 | 초다양성 바라보기 | 동일성의 발명 | 요약
3장 종속된 언어 다양성
언어 속지주의 | 언어의 공간적 분리 | 언어 속지주의 논쟁 | 언어 다양성과 개인의 책임 | 몰입 환경에서의 풀뿌리 언어 학습 | 화자 판단하기 | 언어 다양성과 도덕 가치 | 언어 학습자 새롭게 만들기 | 요약
4장 노동과 언어 다양성
언어 능숙도와 고용 장벽 | 이름이 뭐길래? | 취업 면접 | 중첩되는 취약성 | 생계 노동과 탈숙련화 | 노동 현장에서의 언어 학습 | 언어 다양성 억압하기 | 대안적 언어 체제 | 요약
5장 교육과 언어 다양성
다중언어 학교의 단일언어 아비투스 | 서브머전 교육 | 복잡해지는 불리함 | 언어 다양성에 반하는 시험 | 잘못된 언어 능숙도 측정 | 부정당하는 다중언어주의의 장점 | 요약
6장 참여와 언어 다양성
참여를 막는 언어 장벽 | 언어와 젠더 격차 | 언어가 이유가 된 폭력 |
미세 공격 | 언어 소외 | 요약
7장 전 지구화와 언어 다양성
언어와 국제 원조 및 개발 | 정의롭지 못한 영어 교육 | 학술 국제어인 영어의 부당성 | 영어권 중심에 조공 바치기 | 국제어로서의 영어가 가져오는 심리적 폐해 | 요약
8장 언어 정의
언어 특권 | 현실적인 언어 유토피아 | 언어 정의를 위한 투쟁
저자소개
출판사리뷰
평등을 극복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과제는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고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의 이주가 일상화된 시대에는 그에 걸맞은 불평등과 정의의 문제가 제기된다. 오스트레일리아 응용사회언어학자인 잉그리드 필러는 그 선두에서 사회 정의와 차별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글로벌화된 세계가 평등과 자유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 언어 다양성과 불평등의 문제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문제들
수많은 불평등 문제 중에서 왜 하필 언어인가? 언어는 모든 불평등과 차별의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2008년, 이라크 성인 557명은 오스트레일리아 정부 프로그램에 따라 영주권을 받고 오스트레일리아에 이민하여 정착했다(책에서는 557명 중 223명을 조사한 결과를 소개한다). 정부의 이민 프로그램을 따른 것이었지만, 이들은 3년이 지난 시점까지 새로운 사회에 적응할 수 없었다. 2011년 오스트레일리아의 전체 실업률은 4.9%였는데, 이 이라크 이주자들의 취업률은 4.9%였다.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니 당연히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이들은 이라크 전쟁 당시 오스트레일리아군에 협력하여 통ㆍ번역사로 일했던 이들과 그 가족들이다. 영어로 의사소통하는 데 어려움이 없고, 심지어 오스트레일리아인들과 함께 일해 본 경험도 있었다. 이들 중 135명은 대학 교육도 받았고, 전공을 살려 일한 경험도 있었다. 다양한 이유가 중첩되어 있었겠지만, 이 이라크 이주자들은 영어를 못할 것이라는 편견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반대로 어떤 이주자들은 언어를 잘하기 때문에 차별을 받기도 한다. 그들은 언어를 잘 못한다는 편견에 부합하지 않아서 적법한 권리를 누리지 못한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스리랑카 난민 알렉스 씨는 그가 알렉스라는 영어식 이름을 가지고 있고, 미국식 영어 억양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선박을 타고 스리랑카를 탈출하여 바다 위를 떠돌다가 나포되었음에도 자신이 “영어를 한다고, 고향에 있는 미국 남자 미션 스쿨에서 교육을 받았다는 이유로, 학사 학위가 있다는 이유로, 인도에서 MBA를 마쳤다는 이유로” 난민이 될 수 없냐고 항변한다.
이주자가 실제로 언어를 못 한다면 ‘언어를 배울 의지가 없다’며 차별받는다. 이주한 국가의 언어를 못 하는 이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기는 쉽다. 어떤 이들은 SNS에서, 또 다른 이들은 광장에 모여 “우리 말을 배우지 않겠다면 당신은 우리나라에 살 자격이 없다.”, “여행하기 위해서도 언어를 배우는데 살기 위해 언어를 배우는 게 뭐가 어렵나?”, “우리말을 못 하는 이유는 당신이 게으르기 때문이다.”라며 이주자들을 비난한다. 그러나 누구나 경험해 본 것처럼 온전히 언어 학습에만 집중해도 익히기 어려운 것이 외국어인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생계를 위해 일하면서 틈틈이 다른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환상에 가깝다. 더군다나 이주 노동자들이 생활에 밀접한 표현을 배울 수 있는 언어 학습 프로그램은 거의 발견하기 어렵다.
이주자들이 새로운 사회에 정착하지 못하는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다. 그러나 언어가 이유가 된 차별은 다른 차별들보다 좀 더 관대하게 받아들여지곤 한다. 심지어 언어는 다른 차별을 묵인하거나 정당화하는 근거로도 사용된다.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서 고용을 못 한다는데 어쩌겠는가? 말이 안 통하는데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적어도 언어는 배우려고 노력해야 다른 문제가 해결될 것 아닌가?라고 말이다.
언어의 차이가 인권 침해와 권리 박탈로 이어지는 순간
언어에 관한 편견은 이주자들이 고용의 문턱을 넘기까지 거대한 장벽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입사의 장벽을 통과한 후에도 언어는 지속적으로 이주 노동자들을 괴롭히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어떤 직장은 이주 노동자들이 공식어를 제외한 다른 언어를 쓰지 못하도록 강제한다. 그런데 대체 ‘다른 언어’란 무엇인가? 오스트레일리아의 한 병원은 간호사들이 점심시간에 필리핀에서 사용하는 ‘타갈로그어’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해고했다.
담당 변호사는 간호사들이 ‘점심시간에’ 사용한 언어가 그저 영어에 타갈로그어를 섞어서 쓴 것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간호사를 해고한 병원은 간호사들이 정확하게 어떤 언어를 어떻게 사용했는지 설명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이 쓴 타갈로그어는 ‘한 단어’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단어는 필리핀 음식 이름일 수도 있고, ‘바궁’이라는 생선 소스를 가리키는 말일 수도 있다. 이렇듯 병원이나 호텔 같은 직장에서 공식어 사용을 강제하는 사내 규칙은 아주 그럴싸하지만, 자세히 뜯어 보면 이주 노동자를 차별하고 자유롭게 해고하는 데 악용되기 십상이다.
언어 다양성을 적극적으로 고려하지 않는다면 한 집단과 민족이 교육받고 미래를 영위할 권리를 완전히 박탈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루마니아 세케이 지역에 사는 세케이 헝가리 민족은 헝가리어를 모어로 사용한다. 이들은 가정에서 지역 사회에서 헝가리어로 의사소통을 하지만, 루마니아의 교육 정책에 따라 국어 시간에는 루마니아어를 배우고 헝가리어는 외국어로 배운다. 당연히 루마니아어도 제대로 배우지 못할뿐더러 헝가리어를 높은 수준까지 배울 기회도 얻지 못한다. 루마니아어로 배워야 하는 다른 과목은 말할 것도 없다. 인접한 유럽 연합 회원국인 헝가리의 국가 수준 교육과정을 빌려 와 사용할 수도 있지만, 이는 루마니아의 교육 주권을 침해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루마니아는 세케이 헝가리 민족이 모어로 직업 교육과 고등 교육을 받을 권리를 박탈하는 편을 선택했다.
말할 수 없고 이해될 수 없는 고통은 극단적인 환경에서 더욱 비극적으로 드러난다. 파키스탄 난민 수용소에서 태어나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한 마르지에 라미히는 2007년 14년간의 결혼 생활 끝에 남편에게 목이 졸려 숨졌다. 늘 가정 폭력에 시달렸던 마르지에는 도움을 받기 위해 오스트레일리아 긴급 전화 서비스인 트리플 제로에 두 번이나 전화를 했다. 그러나 전화 상담사는 마르지에의 어설픈 영어를 알아들을 수 없었고, 마르지에는 결국 죽임을 당했다. 이렇듯 한 사회 속에서 말할 수 없고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은 사회가 제공하는 기본권을 누릴 수 없음을 의미한다. 서로 다른 언어가 그저 ‘다양성’으로 치부되고 진지하게 고려되지 않을 때, 언어로 인한 불평등과 인권의 박탈은 매우 극단적으로 드러날 수 있다.
언어 다양성을 어떻게 인정하고 포용할 것인가
그렇다면 언어의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를 온전히 개인이 감내해야 할까? 저자는 세계화로 인한 이익과 번영을 모두 함께 누리는 만큼 그에 따른 비용을 한 사회가 함께 지급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한 사회의 필요에 의해 이주 노동자를 ‘초청’해 오는 만큼, 이주 노동자들이 언어를 배울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통번역 서비스를 제공하는 등 비용도 함께 부담하자는 것이다. 나아가 세계에서 ‘초핵심부’ 언어인 영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영어를 모어로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에 비해 훨씬 큰 언어적 혜택을 누리고 있음을 지적한다. 또한 전 세계적으로 언어가 위계화되고 계층화되어 있기 때문에 국제 사회가 전 지구적 차원의 언어 정의를 위해 언어적 실천을 성찰해야 함을 촉구한다.
이 책은 세계 각지에서 발견할 수 있는 언어 다양성과 불평등의 문제를 다루며, 저자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경험하거나 연구한 사례를 다수 포함한다. 오늘 우리의 모습도 이 책의 이야기와 전혀 다르지 않다. 서울은 세계인과 세계 문화가 응집한 거대도시가 되었으며, 전국 방방곡곡에서 이주민과 정주민이 어울려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바로 이곳에서부터 언어 다양성과 불평등에 관한 성찰을 시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