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동유럽에 대한 편견에 건네는 작별인사이자
동유럽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천년의 여정
전쟁, 혼란, 후진성 등을 연상시키는 ‘동유럽’이란 말은 동유럽 주민 스스로도 사용하기 꺼리는 용어가 되었다. 하지만 이는 서유럽 중심주의에 기반한 편견으로, 《굿바이, 동유럽》은 이러한 잘못된 고정관념을 깨고 동유럽 고유의 정체성을 보여주고자 나온 책이다.
동유럽은 수많은 민족과 종교가 혼재하고, 오늘날 20여 개 나라가 복잡한 경계를 이루며 존재하는 지역이다. 그런 만큼 이 지역의 역사를 한 권에 담아내기란 여간 어려워 보이지 않는데, 지은이는 이러한 ‘다양성’을 핵심 키워드로 삼는 역발상으로, 복잡다단한 동유럽사를 일관성 있게 꿰어내는 놀라운 통찰을 보여준다. 1천 년 이상의 시간에 걸쳐 종교·민족·제국·전쟁·사상 등 14개 테마로 동유럽 정체성을 풀어낸다.
나아가 수많은 이야기에 상당한 비중을 두는데, 특히 폴란드 유대인 출신인 지은이 집안의 경험을 들려주는 것도 이채롭다. 이를 통해 구체성이 떨어지는 제국·국가 간의 경쟁이나 정책이 아닌, 역사적 사건과 흐름이 동유럽 사람들의 실제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실감 나게 서술한다.
목차
프롤로그
1부 신앙
1장 토속신앙인들과 기독교인들
2장 유대인들
3장 무슬림들
4장 이교도들
2부 제국과 민족
5장 제국들
6장 민족들
7장 유랑자들
8장 민족주의
3부 20세기
9장 ‘아름다운 시절’의 종식
10장 예언자들
11장 2차 세계대전
12장 스탈린주의
13장 사회주의
14장 해빙
에필로그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주
도판 출처
찾아보기
저자소개
출판사리뷰
《스펙테이터》, 《블룸버그》, 《북페이지》 2023 ‘올해의 책’ 선정
우리는 왜 동유럽의 역사를 알아야 할까?
지금껏 우리에게 동유럽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무지와 피상적 이미지는 동유럽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낳곤 한다. ‘서유럽보다 수십 년 뒤떨어졌고 유럽연합을 통해 이제야 낙후성을 극복하기 시작한 후진적 2등 유럽’ 같은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는 서유럽 중심의 세계관과 역사관이 우리에게 내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개 서유럽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시각에서 서유럽 역사를 ‘세계사’라고 칭하듯, ‘서양사’ 역시 동유럽의 역사는 배제되어 있다. 동유럽을 제대로 알아가는 과정은 곧 반쪽짜리 서양사를 온전히 채워가는 일이기도 하다.
더욱이 동유럽의 역사는 우리와 비슷한 면이 있다. 대제국과 강대국 사이에 끼여 생존권과 주권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쳐야 했던 생존투쟁의 역사라는 점에서 말이다. 반면 우리와 사뭇 다른 면도 있는데, 수많은 민족·언어·종교가 혼재된 ‘다양성’이라는 정체성이다. 작은 마을 안에서도 저 건너편에 다른 종교를 믿는 다른 민족의 이웃이 살았고, 갈등이 없지 않았지만 대체로 서로가 서로를 용인하며 어우러져 오랜 세월을 살았다. 사회 분열이 극단화되어가는 최근의 사회 분위기에서 새겨볼 만한 지점이다.
이처럼 동유럽에 가진 편견을 걷어내고 그 역사와 문화를 진지하게 들여다봐야 할 필요성이 커지는 때에 시의적절한 동유럽사 개설서가 나왔다. 그런데 그 제목이 독특하게도 《굿바이, 동유럽》이다. 동유럽 역사를 다루는 책이 왜 동유럽과 작별하고자 하는 것일까?
동유럽에 대한 편견에 건네는 작별인사이자
동유럽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천년의 여정
폴란드계 미국인인 《굿바이, 동유럽》의 지은이 제이콥 미카노프스키는 “이 책은 존재하지 않는 지역에 대한 역사다. 동유럽 같은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도발적인 선언으로 책을 시작한다. 전쟁, 혼란, 후진성, 중간 지대 등을 연상시키는 ‘동유럽’이란 말은 동유럽 주민 스스로도 사용하기 꺼리는 용어가 되었고, 최근에는 ‘중유럽’이 이를 대체하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이념적·정치적·군사적 장벽이 제거되고, 아무리 여행과 이동이 활발해져도, 조각보같이 현란해 보이는 표면 밑에 잠재한 동유럽의 정체성과 특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20여 개 나라가 복잡한 경계를 이루며 혼재한 동유럽 지역은 역사적으로는 합스부르크제국·독일제국·러시아제국·오스만제국에 속했고, 종교적으로는 가톨릭·개신교·정교회·유대교·이슬람을 신봉했다. 지은이는 이런 특징을 “동유럽에는 독자적인 것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서유럽과 구별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라시아와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가장 핵심적이고 확실한 특징은 다양성이었다. 언어의 다양성, 인종의 다양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종교의 다양성이다”라고 〈프롤로그〉에서 표현했다. 그리고 이러한 ‘다양성’을 정체성이자 핵심 키워드로 삼는 역발상으로, 복잡다단한 동유럽사를 일관성 있게 꿰어내는 놀라운 통찰을 보여준다.
14개 테마로 읽는 동유럽의 내밀한 역사
그 거칠고 찬란한 다양성의 만화경
기존에 동유럽 역사와 문화를 다루는 방식(한국에는 동유럽사를 다룬 책 자체가 드물지만)은 대개 이 지역에서 지배적 역할을 한 제국을 중심으로 서술하거나, 20세기 주요 국가들의 이야기를 복합적으로 다루는 식이었다. 그러나 이 책은 1천 년 이상의 시간에 걸쳐 종교·민족·제국·전쟁·사상 등 14개 테마로 동유럽 정체성을 풀어낸다.
우선 1부 〈신앙〉에서는 토속신앙에서 시작해 외부 종교들(기독교, 유대교, 이슬람 등)과 그 신봉자들이 어떻게 중세기에 점차 동유럽으로 밀려들어와 정착했는지를 보여준다. 이런 외부 집단들은 민족적·종교적 정체성이 한 묶음인 경우가 많았다.
이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유입될 수 있었던 것은 이들(특히 유럽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을 적극 받아들이고 정체성에 따라 차별하지 않았던 오스만제국의 정책 덕분이었다. 그러다 점차 제국의 힘이 약해지고 계몽주의 등의 영향으로 민족(및 종교)마다 자신들의 땅에서 고유한 정체성(특히 언어)을 갖고 독립적인 정치체를 일으키려는 민족주의가 발흥했다. 이러한 제국·다민족·민족주의의 얽힘이 2부 〈제국과 민족〉에서 다루어진다.
3부에서는 우리가 보통 동유럽 하면 어렴풋하게나마 아는 역사이자 선입견의 바탕이기도 한 〈20세기〉를 다룬다. 지은이는 1, 2부에서 다룬 이전의 역사·문화·정체성에 기반해 20세기사를 차근차근 다루는데, 그 일관성의 힘이 이 복잡하고 처절한 동유럽의 현대사를 무리 없이 이해해나가도록 이끌어준다.
동유럽 사람들은 굴곡진 역사를 어떻게 경험하고 받아들였는가
이 책의 또 다른 특장점은 수많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마치 에세이같이 서술된다는 점이다. 지은이는 설명을 아끼고 사례를 통해 그 함의가 드러나게 하는 전략을 취한다. 이것은 물론 독자들에게 더욱 재미있고 효과적으로 설명하려는 목적도 있겠지만, 한편으로 동유럽인의 후손인 지은이가 ‘동유럽인이 공유하고 있는 유산’을 따르고자 한 의도인 듯 보인다.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유럽은 하나의 유산을 서로 공유하고 있는데, 그것은 비극 속에서 희극을 보는 재능이다. 극단적으로 전개된 역사에 오랫동안 익숙해진 경험은 우리에게 부조리에 대한 비상한 유창함을 부여해주었다. … 내가 보기에 갑작스러운 재앙, 예기치 않은 반전, 기적 같은 탈출이 가득한 이러한 비극-희극 이야기들은 동유럽의 진정한 공용어다.” - 〈프롤로그〉에서
나아가 폴란드 유대인 출신인 지은이 집안의 경험을 들려주는 것도 이채롭다. 지은이는 “이 책이 가족사는 아니지만, 나의 가족사는 이 책을 묶는 끈이다”라고 고백하면서, 자신-가족-동유럽 사람들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자연스럽고도 감성적으로 엮어낸다. 한 사건의 기술이나 역사 서술에서 당사자나 가족이 어느 정도 연관되어 있는가는 서술자의 연구와 탐구 동기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에 따라 독자는 동유럽 역사와 정체성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가슴으로 느끼게 된다.
요컨대 이 책은 구체성이 떨어지는 제국, 국가 간의 경쟁이나 정책이 아닌, 동유럽 개인의 삶에 영향을 준 사건들을 실감 나게 서술한 탁월한 역사 에세이이다. 지은이는 동유럽이란 거대한 지역에서 일어난 많은 일이 국가·사회·가족·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역사가의 관점에서 잘 서술하고 있다. 동유럽에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이 책을 통해 동유럽 정체성과 문화사에 대한 소양이 한층 깊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