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마지막 농경사회의 나날들을 기록하다
“모든 삶은 사회적이다”라는 기치 아래, 평범하지만 특별한 개인의 삶을 통해 시대와 사회를 이해하려는 ‘한사람 생활사’의 두 번째 책이다. 이번에는 제주 조천읍 선흘리에서 척박한 제주 동쪽의 중산간 땅을 일구며 살았던 한 농부의 일기를 통해 1960년대 제주 농경사회를 들여다보았다. 고병문의 농사일기는 1964년 5월부터 1965년 12월까지 당시 농림부에서 실시한 ‘농가경제조사’의 일환으로 기록되었다. 일기가 쓰인 1964년도는 사회적·역사적으로 중요한 시기였는데,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가 1963년 10월 15일 선거를 통해 제5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 처음 맞이한 해였다.
그에 앞서 1962년 6월 갑작스럽게 단행한 화폐개혁으로 화폐단위가 ‘환’에서 ‘원’으로 바뀌게 되고 100환은 1원의 가치로 조정되었다. 또한 그해 10월에 발표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한국사회는 대대적인 개발시대의 문 앞으로 향해가고 있었다. 일기에는 이러한 변동기의 경제지표가 될 물가와 마을마다 벌어지던 도로 포장사업, 제주도 축산업 변동의 단면 등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이런 시기에 쓰인 고병문의 일기는 농업기록물일 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 변동을 세밀히 관찰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기록물이기도 하다.
목차
[여는 글] 농경사회의 마지막 일기…06
1964년
5월, 보리 익어가는 봄…16
6월, 보리가 쌀이 되는 여정…46
7월, 하늘을 읽는 조 농사…76
8월, 제주의 마음, 메밀…102
9월, 촐 베는 날들…126
10월, 조가 익고 술이 익는 계절…150
11월, 보리 갈 때가 되었구나…170
12월, 숯 굽는 겨울…192
1965년
1월, 겨울 일거리…214
2월, 겨울에 세상을 등지고…230
3월, 수눌어 김매고, 수눈값 갚아 김매고…246
4월, 일어서는 봄…268
[부록] 고병문 농사 일기 원본…284?
저자소개
출판사리뷰
이 책은 고병문의 농사일기에서 1964년 5월부터 1965년 4월까지 1년간의 일기를 싣고, 주요 항목마다 세심한 각주를 달았다. 또한 달마다 ‘물의 공동체’ ‘닭 잡아먹는 날’ ‘갈옷 만들기’ ‘소와 밭담’ ‘오메기떡과 고소리술’ ‘땔감 전쟁’ 등 일기의 배경이 되는 제주 농경사회와 전통문화 등에 따른 해설을 붙였다. 책의 말미에는 고병문의 일기 원본을 함께 실었다. 저자는 “수천 년 쌓아온 농경사회의 지식을 부지런히 기록하고 저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무서운 속도로 발전과 변화를 거듭하고 그만큼의 속도로 과거와 단절되는 지금, 마지막 농경사회의 모습을 기억하는 어르신들이 사라지는 지금, 시간이 별로 없는 지금이지만 “우리의 심성과 습관과 언어의 뿌리는 거기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병문의 일기를 만난 것은 4년 전이었다. 고병문 삼춘 내외는 마을에서 신망이 높은 어른들이다. 외지에서 들어와 마을일 거들고 하는 나를 따뜻이 보살펴 주셔서 댁에 놀러 다니기도 하며 살아온 이야기를 간간이 들어오던 사이였다. 2020년 1월 새해 인사를 드리려고 삼춘댁에 들렀다가 여느 날처럼 옛날 농사짓던 이야기를 여쭙던 중이었다. “그거 옛날 일기에 적어둔 게 이실(있을) 건디….” 하시는 거였다. 나는 깜짝 놀라서 일기를 가지고 있으시냐고 했더니, 병문이 삼춘은 먼지 쌓인 창고도 아니고 작은방 서랍에서 무심히 꺼내오셨다. 그렇게 이 일기를 만나게 되었다. “대단한 이야기도 아니고, 다 이렇게 산 건디, 무사(왜) 이런 얘기를 듣젠(들으려) 하느냐.”고 멋쩍어 하시는 고병문 삼춘을 선생님으로 모시고 2020년 2월부터 1964~65년의 일기 공부가 시작되었다. 2월이면 제주도 시골은 귤농사 준비로 바빠지는 때다. 귤나무 가지치기, 밭담 정비, 약 치기, 비료 뿌리기 등등으로 한 해 농사가 시작된다.
주말에는 시내에 사는 아들이 와서 같이 하지만 대부분 80대 노인 내외가 해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의 수업시간은 일 못 하고 집에서 쉬는 ‘비 오는 날’이 되었다. 나는 ‘비가 언제 오나….’ 일기예보를 보며 수업시간을 기다렸다. 보통 하루에 서너 시간씩 공부했는데, 네 시간이 넘어가면 삼춘은 생생한데 내가 지쳐서 더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이해를 잘 못하면 병문이 삼춘은 그림을 그려가며 열정적으로 설명해주셨다. 할머니가 계신 날에는 옆에서 슬쩍슬쩍 추가 해설을 넣어주셨는데, 여자가 더 잘 아는 분야가 나오면, “아니, 그게 아니주.” 하면서 할아버지를 제치고 설명해 주시기도 했다. 일대일 과외도 이런 과외가 없는데, 선생님이 두 분이라 아주 고급 과외를 받는 셈이었다. 두 선생님과 일종의 야외 학습으로 일기에 나오는 대로 ‘탈 타레(산딸기 따러)’도 다니고, 남의 보리밭에 콤바인이 다 걷어가지 못한 보리도 베어보는 사이 봄이 가고, 6월 장마를 지나서야 일기 공부가 끝났다. 5개월간의 다시 없을 수업이었다.
고병문의 농사일기는 1964년 5월부터 1965년 12월까지 당시 농림부에서 실시한 ‘농가경제조사’의 일환으로 기록된 것이다. 1953년 농림부와 한국은행이 합동으로 실시한 ‘농촌실태조사’가 우리나라 최초의 농가조사였는데, 1954년부터는 농림부가 ‘농촌실태조사’를 ‘농가경제조사’와 ‘농산물생산비조사’로 분리하여 실시하기 시작했다. 1961년부터는 전국 농가 중 80개 조사구 1,182개 농가를 임의표본으로 추출하여 조사하기 시작했고, 1964년에는 제주도 북제주군(현 제주시)에서 선흘리 36가구가 조사 가구로 지정되었다. 농림부 서기관이 파견되어 선흘에 살면서 가구별 기록을 확인하고 수집했다고 한다. 농가경제조사를 위해 일기에 들어가야 할 주요 항목이 제시되었기 때문에 노동 인원, 노동 시간, 노동 내용, 곡물이나 물건의 교환 금액, 토지의 크기 등이 밝혀진 중요한 기록물이 될 수 있었다.
일기가 쓰인 1964년도는 사회적·역사적으로 중요한 시기였는데,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가 1963년 10월 15일 선거를 통해 제5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 처음 맞이한 해였다. 그에 앞서 1962년 6월 갑작스럽게 단행한 화폐개혁으로 화폐단위가 ‘환’에서 ‘원’으로 바뀌게 되고 100환은 1원의 가치로 조정되었다. 또한 그해 10월에 발표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한국사회는 대대적인 개발시대의 문 앞으로 향해가고 있었다. 일기에는 이러한 변동기의 경제지표가 될 물가와 마을마다 벌어지던 도로 포장사업, 제주도 축산업 변동의 단면 등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이런 시기에 쓰인 고병문의 일기는 농업기록물일 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 변동을 세밀히 관찰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기록물이기도 하다.
일기를 해설하며 전통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이행되는 시기에 한 성실한 농부가 기록한 일기를 통해 제주도 전통농업의 모습을 복원하고, 일기에 드러난 당시의 사회·경제적 변동을 포착해 그 배경을 해설하려고 노력했다. 불과 60년 전의 일기지만, 우리 사회는 그 이후로 급격한 변화를 맞이한 탓에 이제는 거의 흔적이 사라진 삶의 모습이 담겨 있다. 마지막 농경사회의 모습인 것이다. 1964년은 백 년 전, 천 년 전과도 닿아 있을 것이다. 인류가 정착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농사는 계속되어왔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이 일기의 나날들은 2024년보다 천 년 전과 더 가까울지 모른다. 인류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무서운 속도로 발전을 거듭하며, 그만큼의 속도로 과거와 단절되는 것 같아 겁이 날 때가 있다. 수천 년 쌓아온 농경사회의 지식을 부지런히 기록하고 저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AI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의 심성과 습관과 언어의 뿌리는 거기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삶을 살았던 어르신들은 거의 돌아가시고 이제 얼마 남아 계시지 않는다. 시간이 별로 없다.
소중한 실증 자료를, 이 자료를 만든 이가 건강하고 기억이 생생할 때에 만나 공부할 기회를 얻은 것은 놀라운 행운이었다. 농가경제조사를 위한 일기가 전국 곳곳에서 기록되었지만 보통 작성한 일기를 농림부에 제출해 남아있지 않는 경우가 많을 텐데 고병문 삼춘은 먼저 이 일기를 쓰고, 달마다 깨끗하게 베껴 써서 정서본을 제출했다고 한다. 그리고 새마을운동과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주택이 개량되고 낡은 것을 내다버리는 것이 당연시되던 시기를 지나오면서도 삼춘은 일기를 소중히 간수해 왔다.이렇게 만난 자료지만 제주도에서 나고 자라지 않은 내가 귀담아 듣고 자료를 찾아 공부하는 것만으로 60년 전의 일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럴 때면 40여 년 생활사를 연구해 오신 고광민 선생님께서 도와주시고 격려해 주셨다. 고병문 삼춘 내외, 고광민 선생님, 조수용 삼춘을 비롯한 선흘마을 어르신들의 가르침으로 하나하나 배우며 겨우 이 책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읽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은 글을 반갑게 받아주고 정성 들여 편집해 주신 한그루 출판사의 마음이 더해져 ‘한사람 생활사’의 걸음을 한 발 더 내딛게 되었다. 가난한 백성들의 이야기를 가난한 백성들이 힘을 합쳐 엮은 셈이다. 어려운 시절을 힘껏 견디며 헤쳐왔고 헤쳐갈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을 기리며 책을 내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