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나는 가로세로 반듯한 길에서조차
길을 잃어버리는 사람이로구나”
헤매고 방황하는 미로 속에서
기록하고 기억하며 길을 찾아가는 이들의
느리지만 반짝이는 여정
2010년 단편소설 「체이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후 두 권의 소설집과 다섯 권의 장편소설 그리고 번역서까지 꾸준히 출간하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작가 문지혁의 세번째 소설집 『고잉 홈』이 문학과지성사의 2024년 첫 소설집으로 출간되었다. ‘작가의 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2022년 두번째 소설집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다산책방)가 11년 만에 나온 것과 달리 2022년에서 2023년 2년 사이 집중적으로 씌어진 소설들로 묶인 이번 소설집은, 각각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매력을 넘어서 아홉 편의 작품이 어우러져 새롭게 만들어내는 길을 만나는 특별함이 있다.
목차
에어 메이드 바이오그래피
고잉 홈
핑크 팰리스 러브
크리스마스 캐러셀
골드 브라스 세탁소
뷰잉
나이트호크스
뜰 안의 볕
우리들의 파이널 컷
해설 슬픔의 생애 · 박혜진
작가의 말
저자소개
출판사리뷰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공중에 있는 것도 아니고 땅에 있는 것도 아닌, 미국도 아니고 한국도 아닌 이 시공간”─세계의 피폐 속에서 홈 찾기
『고잉 홈』은 미국을 삶의 터전으로 하여, 유학 혹은 이민 생활을 하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아홉 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책의 처음에서 독자가 맞닥뜨리는 공간은 공항이다. 뉴욕발 한국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부부. 소설집은 한국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에어 메이드 바이오그래피」는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한국으로 가는 아내와 동행하며 비행기 안에서 장인의 전기를 써내려가는 미국인 사위의 기록이다. 미국 이민 1세대인 이호철의 파란만장한 미국 정착기는 한국 이민자의 전형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아내의 죽음 이후,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택한다. 결국 그곳에서 병을 얻어 죽음을 앞두고 있는 그는 바이오그래피마저 홈이 아닌 에어에서 씌어진다. 그는 홈을 찾아 한국에 간 것이 맞을까? 한국이 그의 홈이었을까? 그렇다면 호철의 딸에게 홈은 어디일까? 이런 물음을 안고 한발 더 내디디면 표제작 「고잉 홈」이 기다리고 있다. 이 작품에서 가리키는 ‘홈’은 뉴욕이다. 시카고에서 뉴욕까지 가는 차편을 제공하고 거기에 사례금 5백 달러까지 지급한다는 공고에 주인공 현은 고민할 필요도 없이 AI 소설 실험에 참가한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질문에 답을 하고 그것이 가공되어 AI가 쓰는 소설에 활용되는 이 실험에서 현은 자신의 가족과 꿈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 이야기들은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현의 가지고 있던 종이로 접은 유니콘처럼 세상에 없는 것, 하지만 그가 살고 싶어 하는 진실이 담겨 있기도 하다. 그러니 그것을 가짜라 할 수 있을까? 그가 즉석에서 만들어낸 그 소설을 완전한 허구라 할 수 있을까? 우리가 닿고자 하는 ‘홈’으로 가는 길에 진실이 담긴 허구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일. 문지혁의 이번 소설집 제목이 ‘고잉 홈’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홈’을 떠나와야만 했을까. 그 다양한 사정이 이어지는 소설에서 펼쳐진다. 「핑크 팰리스 러브」는 결혼 1주년을 맞은 유학생 부부가 휴가를 떠난 오래된 호텔에서 과거의 연인을 만나는 ‘잔혹한 판타지’다. 이 이야기가 ‘잔혹한 판타지’인 이유는 이 부부가 만나는 과거의 연인이 죽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결혼과 유학은 일종의 도피였으나 끝내 과거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하여 안정적인 정착은 그들에게 요원한 일이 되고 만다. 반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홈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크리스마스 캐러셀」의 열두 살 에밀리는 디즈니월드에서 버려진 뒤 ‘나’의 고모에게 공개 입양되었다. 아빠의 재혼으로 집을 떠나 미국의 고모에게 간 ‘나’는 에밀리의 생일을 맞아 디즈니월드에 원치 않게 동행을 하게 되고, 그곳에서 에밀리를 잃어버리고 만다. 에밀리는 디즈니월드에서 다시 혼자가 되어보는 경험을 해보고 싶었던 것이었고, 이를 통해 엄마가 자신을 버린 것이 아니라 살려준 것임을 기억해낸다. 이 과정에서 ‘나’는 에밀리의 이야기를 듣고 아빠의 재혼을 받아들일 마음을 먹는다. ‘나’와 에밀리는 가족의 상실로 홈을 잃어버렸지만, 자신의 의지로 새로운 홈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 홈을 떠나 타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만남은 또 하나의 안식처가 되어주기도 한다. 먼저 「골드 브라스 세탁소」를 보면, 유학생 모임에서 특별한 에피소드로 인연이 되어 연인으로 발전해가던 남성이 자신뿐만 아니라 유학생 커뮤니티 여기저기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플러팅을 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배신감에 우울해하던 영은 무뚝뚝하지만 특별한 방식으로 소통하고 인터뷰를 진행한 세탁소 주인과의 만남에서 위안을 얻는다. 「뷰잉」은 미국 유학 시절에 만난 맹 선생님의 부고 소식에 3년 전 기억을 떠올리는 소설이다. 혼란스럽고 힘든 시기의 특별한 만남은 현재의 온기로 남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나이트호크스」와 「뜰 안의 볕」은 미로 같은 현실 속에서 헤매고 방황하는 이들의 모습이 가장 생생하게 담겨 있는 작품이다. 미국에서 유학 생활 중인 가난한 부부의 불안한 관계와 그들이 벌인 한밤의 병원 투어를 그린 「나이트호크스」는 동명의 호퍼 그림 속 인물에 자신들을 투영하며 캄캄한 밤의 한가운데서 암담한 미래를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미국에서 목회학 석사 졸업 이후의 진로를 고민하는 주인공 늘봄의 복잡한 마음을 담아낸 「뜰 안의 볕」은 회의와 환멸 속에서 자신을 비롯한 다양한 종교와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의 정체성에 대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소설집 마지막에 자리한 「우리들의 파이널 컷」은 죽은 할머니의 유산 상속을 위해 한국에 들어와 소식이 끊긴 아버지를 찾는 딸의 이야기를 인터뷰 형식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팍팍한 현실에서 장애를 가진 아버지의 존재는 무거운 짐의 하나일 뿐이었지만, 뒤늦게 그 사랑의 크기를 확인하게 되는 과정은 늘 조금 늦게 도착하는 생의 진실, 그래서 더욱 반짝이는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이별과 만남, 도피와 귀환의 플롯에서 보이는 보통의 슬픔에는 운명을 개척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마주하는 현실의 벽이 미로처럼 놓여 있다. 문지혁의 ‘헤이코리안 플롯’에 각인된 미로를 기억하며 유난스러운 희비극을 떠올릴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여기 이 소설들에 부서진 벽과 같은 전위적 변화는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어지러운 미로에서 찾아낸 지름길들이 있다. 그들은 천천히 만나고 이야기로 만난다. 이별의 순간을 사랑의 순간만큼이나 삶의 중심에 놓는다. 도피 속에서 길을 잃을 땐 타인의 도피처가 되어주고 돌아가는 것을 패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박혜진 해설「슬픔의 생애」에서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우리는 도착할 거니까”─그렇게 함께, 우리는 집으로 가는 길 위에 있다
가야 할 곳은 정해져 있고 거기가 어딘지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그러니까 그 사이에서 우리가 집이라고, 고향이라고, 본토라고 부르고 믿는 모든 곳은 결국 길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우리는 모두 길 위에 서 있고, 언젠가 이 여행이 끝나면 비로소 다 같이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모두에게 그 여행이 너무 고되지 않기를.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우리는 도착할 거니까. ―‘작가의 말’에서
■ 작가의 말
나오는 데 11년이 걸렸던 지난 소설집과 달리 이번 소설집의 원고는 2022년과 2023년 두 해 사이에 집중적으로 씌어졌다. 그런 만큼 소설집으로 묶이게 될 전체 모습을 상상하면서 퍼즐을 완성하는 것처럼 필요한 조각들을 한 편 한 편 만들어가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책을 읽는 이들이 각각의 이야기뿐 아니라 작품들이 모여 만드는 모자이크를 함께 상상해준다면 작가로서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이다.
원래 책의 제목으로 염두에 둔 것은 ‘뜰 안의 볕’이었고, 이 한국어 제목의 도드라짐을 위해 나머지 모든 소설에는 일부러 영어 제목을 썼다. 하지만 편집 과정에서 편집부가 다른 의견을 주었는데 그 제목이 ‘고잉 홈’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 소설들은 이민자들의 이야기일 뿐 아니라 사실 모두가 집에 가는, 집에 가고 싶은, 집에 가려고 하는 이야기였다. 내 나라. 내 고향. 내 본향. 내가 떠나왔고, 그래서 반드시 돌아가야 할 곳. 여행의 진짜 목적지는 도착한 후에야 찾게 되듯, 나 역시 새로 발견한 이 제목이 마음에 든다. 내 지난 여정의 비밀한 목적지는 결국 ‘고잉 홈’이었던 셈이다.
흩어져 있던 모난 원고들을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준 김필균 편집자와 문학과지성사, 작품 이면의 무의미들을 모아 의미로 이름 붙여준 박혜진 평론가께 감사드린다. 나의 힘이자 백본, 부모님과 동생에게 감사한다. 내가 살아가는 매일의 세계를 완성시켜주는 아내와 두 딸에게 사랑을 전한다. 교실 안팎에서 만나는 학생이자 동료인 예술가들에게 감사한다. 말하고 가르치는 자리에 서 있지만 실은 늘 듣고 배우고 있음을 고백한다. 무엇보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 아직도 문학과 소설의 희미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 당신에게 감사한다. 읽고 쓰는 일이 우리를 구원하지는 못할지라도, 어제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게 하리라 는 미련한 믿음을 나는 여전히 품고 있다.
가야 할 곳은 정해져 있고 거기가 어딘지는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그러니까 그 사이에서 우리가 집이라고, 고향이라고, 본토라고 부르고 믿는 모든 곳은 결국 길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우리는 모두 길 위에 서 있고, 언젠가 이 여행이 끝나면 비로소 다 같이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모두에게 그 여행이 너무 고되지 않기를.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우리는 도착할 거니까.
2024년 서울,
봄을 기다리며
문지혁